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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9.24 18:30 수정 : 2014.09.25 12:04

대학을 졸업하고 출판사에 입사했다. 두해 동안 잡지를 만들었다. 마감은 두달에 한번 돌아왔다. 편집 실무자는 나 혼자였다. 현장감 있는 기사를 싣기 위해 주말마다 시위 현장에 나가 사진을 찍었다. 필자 관리도 인터뷰도 전부 내 몫이었다. 점차 퇴근이 늦어지고 생활은 불규칙해졌다. 아침에 일어나는 일이 힘에 부치기 시작했다. 그래도 출근을 서두르지 않았다. 그게 뭐가 중요한가. 정해진 시간에 잡지가 나오면 되는 거지. 이 때문에 잦은 지각을 문제 삼아 상사가 싫은 소리를 했을 때, 납득할 수 없었다.

두해가 지나고 단행본 출판사를 차렸다. 잡지보다는 마감에 여유가 있었다. 그렇다고 마구잡이로 책을 내자는 건 아니었지만, 일은 각자 알아서 하면 된다고 여겼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구성원이 늘자, 지각을 하는 직원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식전 댓바람부터 머리를 맞대고 할 얘기가 있는 것도 아닌데. 주말에는 회사 이벤트에 혹사당하고 교정지를 가방에 넣어 퇴근하는 직원이다. 그래서 지각을 신경 쓰는 나 자신을 발견했을 때, 역지사지는 당치도 않은 말임을 깨달았다.

그런데 제 회사도 건사하지 못하는 인간이 이런 글을 써도 될까. 얼치기 사장 주제에 저 혼자 정의로운 척 꼴값 떨고 있다는 뒷말을 듣지나 않을까. 가뜩이나 어려운 출판계인데 나까지 보탤 필요가 있을까. 하지만 ‘유명 출판사 상무 성추행 사건 뒤늦게 공개… 여직원 “수습 때 오피스텔 데려가 옷 벗으라 요구”’라는 제하의 기사를 비롯하여 그에 따른 후속보도를 마주하는 내내, 나는 한 줄의 글도 쓸 수 없었다. 어떻게든 한 권이라도 더 팔아먹기 위해 매일매일 글을 올리던 페이스북에, 블로그에 아무 얘기도 적을 수 없었다.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한편 ‘애당초 딱 부러지게 거부하지 않은 직원에게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 역시 많은 듯하다. 그런가. 문득 철원이 떠올랐다. 그곳에, 밤마다 나를 괴롭히던 하사관이 있었다. 껴안고, 내 입에 혀를 집어넣고, 자신의 성기를 내 엉덩이에 비비던. 거부하면 다음날 얼차려가, 이등병인 내 선임들에게 부여되었다. 당시의 내 심정이 어땠는지를 굳이 표현하진 않겠다. 다만 한 가지만은 꼭 얘기하고 싶다. 그때 나는 그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중대장에게 보고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망설였다는 얘기가 아니다. 아예 고민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군대란 그런 곳이라고 배웠기 때문이다. 나 하나 조용하면 전체가 편할 거라고 짐작했기 때문이다. 조금만 견디면 지나가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나는 ‘무사히’ 제대했고, 십오년이 흘렀다. 하지만 오늘 남 병장의 사례에서 보듯, 군대는 변하지 않았다.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피해자들은 대개 나와 비슷한 심정으로 견뎌왔고, 이를 바로잡아야 할 주체들은 그 폐쇄성을 묵인해 왔을 테니까. 문제가 되지 않으면 문제 삼지 않겠다는 자세로.

김홍민 북스피어 출판사 대표
<에스비에스> 라디오에 출연한 피해자와 해당 출판사 대표의 인터뷰를 들으며 생각했다. 회사란 ‘또 하나의 가족’이라고 배웠을 그 직원이 ‘문제를 일으킨’ 이유는, 그처럼 덧없는 환상으로 인해 더 이상 자신과 같은 피해자가 나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서일 거라고. 나는 이렇게 알량한 글 하나 끼적이는 것조차 겁이 나는데 당사자가 어떤 심정일지는 짐작도 되지 않는다. 그 앞에서 나는 ‘책도 안 팔리는 마당에 얼른 잠잠해졌으면’ 하고 바랐다. 뭐라 할 말이 없다.

김홍민 북스피어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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