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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4.25 19:12 수정 : 2016.04.25 19:12

세계인문학포럼은 한국이 주도하는 인문학 분야의 세계적 포럼, 즉 인문학의 한류를 목표로 하는 행사다. 올해로 4회째를 맞는 이번 행사는 ‘희망의 인문학’이라는 주제를 내걸었다. ‘문명의 위기를 넘어 지속 가능한 사회로’ 나아가는 데 인문학이 희망을 던져주어야 한다는 의미다.

포럼 제안문을 읽는다. 그런데 좀 수상하다. 인문학이 희망이 되는 건 좋은데, 과학기술을 그 희망의 적으로 간주하고 있다. “근대 이래 ‘과학화’된 기술은 특정 세계관을 전제하고 있는”데, 그것은 “영혼이 증발한 물질적 존재의 기계적 운동”이며, 이러한 “기계론적 자연관 아래에서” 인간은 “영혼 없는 도구적 합리성”에 머물게 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과학기술은 물질적 풍요에는 이바지했지만 영혼을 빼앗아갔다는 뜻이다. 물론 여기엔 어떤 근거도 없다. 인쇄술, 세탁기, 백신의 발명이 민주주의, 여성 인권, 그리고 어린 영혼들을 구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주장할 수 없다면 말이다.

제안문은 한걸음 더 나아간다. “과학은 사유하지 않는다”는 말이 옳다면, 사유는 인문학의 몫이다.” 흥미로운 논증이다. 첫 문장은 하이데거의 유명한 선언이다. 하이데거는 자연과학이 자연을 대상으로 진술하는 학적 체계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과학에서 중요한 것은 대상에 대한 분석과 관찰이지, 진술의 의미와 해석이 아니다. 하이데거는 위의 말이 과학 적대적인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고 덧붙였다. 그가 강조했던 것은 과학적 오만에 대한 경계였다. 과학적 사유의 가능성에 대해 하이데거 이후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여기서 그런 발전은 중요하지 않다. 이제 반대로, 문제는 인문학적 오만에 있다.

과학이 사유하지 않으면 사유는 인문학의 몫인가? 이런 오류는 근본주의 종교세력이 현대 과학을 비난할 때 사용하는 형태와 같다. 즉, 현대 과학이 아직도 풀지 못한 자연의 섭리가 존재하며, 바로 그 때문에 신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를 ‘간극의 신’이라고 부른다. 이 논증은 어이없이 쉽게 깨진다. 왜냐하면, 첫째, 과학조차 모르는 그런 간극의 존재를 알 방도가 없기 때문이고, 둘째, 이미 과학이 발견해 제거한 신의 영역을 인정해버린 꼴이 되어 과학이 신의 영역에 침투할 수 있음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문학은 언젠가부터 과학기술의 손길이 닿지 않는 간극의 영역에서, 그 최소한을 방어하는 데 사활을 걸고 있다. 지난해 포럼의 주제는 ‘질주하는 과학기술시대의 인문학’이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런 인문학은 과학기술에 기생하고 있는 셈이다. 과학기술이 침투하지 않는 한, 간극의 인문학은 학문의 동기를 잃게 되기 때문이다. 과학기술 반대를 위한 인문학은 점점 사라져가는 간극의 신과 비슷한 운명을 맞게 될 것이다. 그 종교가 부패해온 과정에서 생겨난 수많은 교파와 사이비 종교의 향연을 반복하게 될지도 모른다. “과학적 세계 이해는 삶에 봉사하며, 삶은 그것을 받아들인다.” 불과 반세기 전 빈 학단의 선언이다. 우리는 과학의 사유가 인문학의 사유와 동떨어져 존재할 수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

김우재 초파리 유전학자
인문학의 본질을 넘어, 세계적 수준의 행사라기에는 너무나 초라한 수준의 준비와 성과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포럼의 누리집(홈페이지)은 일본 모델 사진으로 해킹되어 있다. 행사의 성과는 인문학 대중화의 취지에 무색하게 제대로 공유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전시성 행사로부터 이익을 얻는 사람들은 극소수의 인문학자들과 정치인들뿐이다. 지난해 포럼에서 이태수 교수가 지적했듯이, 인문학 대중화가 목표라면 동네도서관에 투자하는 것이 더 나을지 모른다.

김우재 초파리 유전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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