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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사회학 연구자 박물관 직원과 몇 마디 얘기를 나누고 돌아서는데 “어디서 왔어요?”라고 그가 물었다. 답을 하고 다시 돌아서는 내게 그가 또 물었다. “원래” 어디서 왔냐고. 사우스 코리아. 불쾌하진 않다. 다만 질문이 따라온다. 나는 늘, 어디에서 ‘온’ 사람임을 환기당한다. 나는 왔고, 그들은 거기에 있다. 나 같은 뜨내기는 그렇다 쳐도 그 많은 입양인이나 현지에서 태어난 동포들은 어떨까, 자동으로 상상하게 된다. 신문을 펼치자. 지난달 <뉴욕 타임스>는 ‘중국으로 꺼지라’는 말로 상징되는 아시아인 차별에 대해 다룬 적이 있다. 미국에서 태어난 한 중국계 미국인의 경험이 보인다. 어디서 왔니. 여기. 아니, 원래 어디서 왔니. 원래 여기. 아니, 너의 국적이 뭐냐고. 아메리칸. 그럼 너의 부모는 어디서 왔니. 중국에서. 아, 그럼 너는 중국인이네. 원하는 답을 얻어야만 끝난다. 네덜란드, 독일과 북유럽 등에서 온 조상을 둔 후손들은 이런 불필요한 족보 캐기를 당하지 않는다. 솔직함이 윤리적, 미적으로 각광받는 시대다. 배려와 존중은 위선이다. 솔직함이란 정직을 보장하는 어떤 시대정신처럼 이 지구 위를 떠다닌다. 프랑스의 마린 르펜이 “위선은 더 이상 불가능”하다고 선포하더니 한국에서 “민중은 개돼지”라는 고위공무원이 출몰하고, 각종 혐오 발언을 한 도널드 트럼프는 미국 대통령이 되기까지 했다. 그런데 고작 어디 출신이냐는 질문 정도가 뭐가 문제겠는가. 어디에서 왔니. ‘어디’라는 장소를 소유했다고 여기는 주인의 언어다. 공화당 지지자 중 일부가 미국인 오바마의 출생증명서에 대한 의혹을 제기했던 이유도 오바마의 피부색 때문이다. 그의 근원을 파헤치는 일에 ‘주인’들은 아무런 죄의식이 없다. 어디에서 ‘온’ 사람들은 때에 따라 어딘가로 꺼지기를 종용받는다. 대도시를 아주 조금만 벗어나면 정치적으로 선명한 차이를 느낀다. “정치적 올바름은 정직하지 않다”라거나 “다양성은 백인 학살의 언어다”라고 쓰인 커다란 광고판이 우뚝 솟아서 나를 내려다본다. 백인 학살이라니. 백인 노동자 계층은 히스패닉과 중국인 노동자에게 밀려 국가에서 버림받은 기분이라고 한다. 세계 최대 규모의 부조로 알려진 미국 남부 조지아주의 스톤마운틴에는 남북전쟁 당시 남부를 이끌던 세 명의 지도자가 새겨져 있다. 일부에서는 남부를 지키려 했던 영웅은 인종차별주의자이기에 이 작품에 대항하는 또다른 인물로 부조를 만들자는 의견도 있었다. “언젠가는 조지아의 붉은 언덕 위에 옛 노예의 후손들과 옛 주인의 후손들이 형제애의 식탁에 함께 둘러앉는 날이 오리라는 꿈”(마틴 루서 킹)을 시각화할 수 있는 작업이다. 하지만 지금 보고 있는 현실은 백인우월주의 단체인 큐클럭스클랜의 당당한 등장이다. 이들은 이제 은밀히 활동할 필요가 없어졌다. 한때의 ‘인종예절’은 이제 인종차별이다. 차별적 문화가 범죄로 제도화되는 과정에서 과거의 주인들은 문화전쟁의 패배자라는 박탈감을 느껴 이 ‘문화’를 움켜쥐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트럼프가 과장되게 행동했을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트럼프의 진정성이 아니다. 트럼프를 통해 뱉어내는 속마음이다. “나는 당신들의 목소리”라던 트럼프를 통해 쏟아지는 말은 백인을 중심으로 한 ‘아메리카 그레이트 어게인’이다. 순수를 경쟁하고 배려와 예의가 위선이 될 때 사회에서 가장 취약한 이들은 누굴까. 각종 차별주의자의 솔직함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부자가 될 수 있는 ‘우리’에 해당하는 사람만이 새로운 기회를 누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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