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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1.25 18:50 수정 : 2015.01.25 18:50


김선우 시인·소설가
19년 전 이십대 중반의 나이로 등단했을 때, 공적인 자리에서 내가 질색하던 말이 ‘여류시인’이라는 수식이었다. ‘여류’도 싫은데 나이와 외모를 지칭하는 말까지 곁들여져 소개될 때 느꼈던 불쾌함은 여전하다. 나이와 외모는 직업의 세계에서 불문이어야 옳다. ‘여류’라는 말은 예술계에서 주로 많이 쓰이는데 여성 예술인 앞에 관습적으로 붙이는 이 말에 대해 그다지 문제의식을 못 느끼는 분위기가 나는 매우 불편하다. ‘남류’라는 말은 쓰이지 않건만 여성의 경우에만 ‘여류’라는 한정어를 붙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남성이 하는 예술은 관형어의 구속이 불필요한 ‘예술’인데 여성이 하는 예술은 ‘여류’라는 관형어에 구속되어 주류에 부속된 지류의 느낌으로 왜곡된다. 여성이건 남성이건 작가는 작가일 뿐이다. 이 자명한 상식이 우리 사회 내밀한 의식 속에선 아직 상식에 도달하지 못하였기에 이런 단어가 여전히 상용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어떤 ‘류’도 아닌 오직 ‘창작하는 자’로 수많은 여성 작가들이 오랜 시간 눈부신 활약을 해왔음에도 여전히 ‘여류’라는 말이 신문기사나 티브이 등 공공매체에서 고민 없이 사용되는 것을 보는 일은 슬프다. 인식의 해방은 말의 해방을 동반해야 비로소 완전해진다. 그 시적 성취와 치열한 생애를 통해 볼 때 시인 고정희 앞에 ‘여류시인 고정희’라 쓰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이야기인가. 누군가 나혜석이나 프리다 칼로를 ‘여류화가’로 한정시킬 때 그들 예술의 진면목은 반 토막 나고 마는 것이다.

김선우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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