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8.02.10 20:30
수정 : 2008.02.10 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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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하시 데쓰야/도쿄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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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창
‘전후 일본’과 천황제를 둘러싼 이야기를 계속하겠다. 칼럼임에도 논문처럼 돼버린 점을 용서해주기 바란다.
두번째 칼럼에서 야스쿠니 신사와 일본의 우파세력-정치가들로 얘기하자면 아베 신조 전 총리가 그 전형-은 천황제를 최대의 의지처로 삼으면서도, 미증유의 위기(히로히토 천황의 전범 기소)에서 천황제를 구한 도쿄재판을 부정하려는 자기모순을 안고 있다고 말했다. 이번에는 그 우파와 대립해온 전후 일본의 좌파·리버럴 세력과 천황을 면책한 도쿄재판의 관계를 생각해 보겠다.
좌파·리버럴 세력이 생각하는 전후 일본의 아이덴티티는 헌법 9조가 담긴 ‘평화헌법’이라고 본다. 그런데 그 평화헌법이 도달한 길은 천황 면책의 영향을 피할 수 없다. 애초 전쟁과 군사력 보유 금지를 규정한 헌법 9조가 천황을 ‘일본국’과 ‘일본국민통치’의 상징으로 규정한 1조와 짝을 이룬다는 것은 최근 연구에서 밝혀지고 있다. 천황제와 일본군, 양쪽이 유지된다면 언제 또 ‘황군’이 부활해 위협이 될지 알 수 없다. 따라서 미국은 천황제를 유지하더라도 다시는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다른 연합국들에 강조하기 위해 일본 정부가 헌법 9조를 수용하도록 할 필요가 있었다. 실제로 미국은 헌법 9조를 수용하지 않으면 천황제의 존속은 보장할 수 없다며 일본 쪽을 압박했다.
그러나 헌법 9조에 따른 일본의 비무장화는 문자 그대로의 형태로는 실현되지 못했다. 공산주의의 위협을 강하게 느꼈던 히로히토 천황은 새로운 헌법에서 정치적 권능을 전혀 갖지 않는 ‘상징’이 됐음에도 일본 방위의 보장을 요구하며 1947년 9월 오키나와에 관한 ‘천황 메시지’를 맥아더 원수에게 보냈다. 그것은 미국에 대해 ‘오키나와 기타 류큐제도’의 ‘25∼50년, 또는 그 이상’에 걸친 ‘군사점령’을 희망하는 것이었다. 헌법 9조에 따라 자신의 군대인 ‘황군’을 잃어버린 천황은, 천황제를 미국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오키나와를 미군에 바친 셈이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 미-일 안보조약이 동시에 체결되는 등 전후의 역사는 오키나와에 관한 천황 메시지를 그대로 이행하는 듯이 전개돼 왔다.
전쟁 포기의 헌법 9조와 평화헌법은 미-일 안보조약에 따라 차례로 공동화되기 시작했다. 안보조약 3조에서 오키나와는 사실상 미국의 군정 아래 놓이게 되고, 미군은 오키나와에 극동 최대의 기지를 설치해 ‘방공의 방벽’으로 삼는다는 구도가 굳어졌다. 베트남전쟁이든 이라크전쟁이든 일본의 기지로부터 미군이 출격했다. 오키나와는 미군의 군정과 반환 뒤 미군 기지의 집중화로 희생을 강요당했다. 천황을 면책한 도쿄재판의 결과물로, 일본 비무장화를 의미하는 헌법 9조와 그것을 보완해 가며 공동화시킨 미-일 안보체제, 그리고 오키나와의 희생이 생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아베 전 총리는 ‘평화헌법’을 ‘전후체제’의 기둥이라며 공격했지만, 진정한 ‘전후체제’라는 것은 바로 도쿄재판의 천황 면책에서 비롯한, 앞에 열거한 사항들 전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확실히 헌법 9조는 전후 일본이 국가로서 군사행동에 나서는 것을 막아왔다. 그러나 오키나와에선 지금도 헌법 9조가 적용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또한 미-일 안보조약이 아시아에서 미군의 전쟁을 가능하게 한 이상 일본은 헌법 9조에 반한 행동을 취해왔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의 좌파·리버럴 세력이 헌법 9조를 ‘세계의 보물’이라고 자화자찬하며 “전후의 평화를 유지하자”고 외치는 것만으로는 천황 면책 아래 오키나와를 잘라버린 ‘전후체제’를 한 발도 넘어서지 못할 것이다.
다카하시 데쓰야/도쿄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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