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한기 소설 <2화>
아이작에 의하면 지의류는 아낌없이 베푼다. 지낭균류의 일종인 지의류는 태생부터 균류와 조류의 공생관계에 의해 탄생한다. 지의류는 자연재해가 발생했을 때 황량한 토지나 암석 위를 점유하여 선태식물이 자라기 위한 기반을 닦는다. 질소가 풍부한 토양을 구분하고 대기오염 정도를 측정하는 데 사용되기도 한다. 중국에서는 차와 약재, 서양에서는 항생제와 향수의 원료로 쓰인다. 바위 표면에 돌기가 돋듯 솟아오른 고착지의류는 돌꽃이라고 불리는 만큼 각양각색의 화려한 외양으로 호사가들에게 각광받는 수집품목이다. 1960년 대지진으로 조각난 북유럽의 에산드리노 공화국을 프랑스의 한 부호가 직경 2미터의 석회암에 자리 잡은 희귀 지의류 브리이에 레브(Briller Rêve)를 경매에 부쳐 도운 적도 있었다. ‘Briller Rêve’는 불어로 ‘밝은 꿈’이라는 뜻이다. 에산드리노 공화국이 국력을 회복한 후 붙여진 이름으로 ‘환희에 찬 꿈’ 정도로 의역할 수 있다. 자기병 속의 발광물질은 ‘환희에 찬 꿈’을 밤에도 하얗게 빛나게 만들었다. 베트남전 당시엔 텔레비전이나 라디오를 틀 때마다 ‘환희에 찬 꿈’을 전면에 내세워 기부를 독려하는 반전 공익광고가 나오기도 했다.
아이작은 인류가 공생하기 위해서는 지의류처럼 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게만 하면 태초의 평화로운 시절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나. 아이작으로부터 시작된 논의는 1980년대 유럽에서 유행하다가 91년 동양으로 건너왔다. 동양에서 특히 아이작은 인기가 많았다. 불교와 접목시킬 수 있는 여지가 많았기 때문이다. 히라키타의 《고착지의와 발보리심(發菩提心): 그 기원을 찾아서》와 쯔윈의 《선불가진수어록(仙佛家眞修語錄)의 길목에 지의류가 있다》가 그 예이다. 나는 아이작과 생각이 다르다. 각국의 학자들이 아이작을 설파하여도 세계가 엉망이 되는 건 막을 수 없었다. 논문이 발표된 이래 121건의 크고 작은 전쟁이 벌어졌고 열한 개의 국가가 사라졌으며 1,334종의 동식물이 멸종됐다.
나는 〈지의류의 보호본능에 대한 적격판단〉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준비 중이다.〈지의류의 보호본능에 대한 적격판단〉은〈지의류의 활동영역과 성악설의 본령〉을 구체화한 논문이다. 나는 5년 전 학회의 지의류 관련 세미나에서 〈지의류의 활동영역과 성악설의 본령〉을 발표했다.〈지의류의 활동영역과 성악설의 본령〉은 지의류의 분포와 인류의 악행을 연결시킨 논문이다. 악행의 증거는 충분했으므로 물샐틈없는 논문이었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아이작을 찬양하는 고고한 식물학계는 재판관처럼 내 논문을 ‘풋내기 학자의 치기’라고 정의했다. 동료들은 등을 돌렸고 지원도 서서히 끊겨버렸다. 오명을 벗기 위해서라도 어떻게 해서든지 새 논문을 완성해야 한다.
선(善)이란 없다.〈지의류의 보호본능에 대한 적격판단〉의 주제다. 나는 지의류의 선 따위는 더더욱 믿지 않는다. 아이작이 주목하는 선천적 공생관계도 허점투성이다. 조류는 균류에게 광합성을 제공하는 대가로 보호받는 것이다. 1939년 나치독일이 구소련을 묶어두기 위해 몰로토프-리벤트롭 조약을 맺은 것처럼 철저한 이해관계이다. 나치가 독일공산당을 강제로 해산시키고 마르크스 서적을 불태운 것과 구소련이 자본주의파시즘을 증오해온 것을 똑똑히 지켜본 이들은 양국의 불가침 조약에 경악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조약은 나치독일이 구소련을 침공하면서 깨진다.
‘환희에 찬 꿈’에 관련된 비화도 있다. 1981년 에산드리노 공화국은 결국 파산으로 멸망했다. 후문에 의하면 에산드리노의 파산은 ‘환희에 찬 꿈’을 앞세운 반전 공익광고의 광고주와 연관돼 있다고 한다. 광고주는 미국의 무기업체였고 기부금 일부는 무기가 돼 베트남에 투입됐다. ‘환희에 찬 꿈’은 개꿈이었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난다. 회중시계가 8시에 가까워지고 있다. 소녀가 올 시간이다. 볼티모어의 주인을 자처하는 노인은 소녀를 보내 매일 아침 나를 자신의 식탁에 초대한다. 소녀는 느릅나무 껍질처럼 윤이 나는 까무잡잡한 피부를 지녔다. 열다섯 정도로 보이지만 알로민 나무 열매처럼 제법 풍만한 젖가슴도 달고 있다. 나는 소녀를 노인의 성 노리개 정도로 여겨왔다. 언젠가 지나가는 말로 노인에게 소녀의 출신에 대해 물은 적이 있었다.
“그 계집애는 밀갈토족이다. 동물이야.”
노인은 퉁명스럽게 답했다. 밀갈토는 칠레 북부 아타카마 사막을 떠도는 유목민족으로 알려져 있다. 밀갈토는 18세기 남아메리카를 점령한 스페인인들이 지어준 이름으로 ‘정오의 햇빛을 보지 못하는 자’라는 뜻이다. 태양의 신을 섬기는 밀갈토는 난생처음 보는 하얀 사람들이 주는 이름을 신의 뜻으로 받아들였고 정복자의 노예로 전락해버렸다. 밀갈토는 지금도 여전히 남아메리카 전역에서 천대받고 있다. 히스패닉계 백인인 노인이 소녀를 업신여기는 이유도 다름없었다.
문이 열리더니 소녀가 들어온다. 소녀를 따라 방을 나설 무렵 창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벌목공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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