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한기 소설 <3화>
11월 30일 4시. 코뮤니즘의 이상은 지의류 군집의 분아(粉芽)를 이용한 실재적 형성과정과 유사하다. 코뮤니즘은 실패를 거듭하면서 쇠퇴해버렸지만 지의류는 아니었고 앞으로도 아닐 것이다. 코뮤니즘은 환상이었지만 지의류는 완벽한 현실이다.
- W. S. 아이작, 《지의류(地衣類)와 선(善)의 형태》 중에서
12월 2일 23시. 프리부츠 나무는 참나무의 일종이다. 다 자란 프리부츠는 아파트 10층만큼 높다. 가장자리가 톱니처럼 갈라진 잎사귀는 검은빛이 은은하게 감도는 녹색이다. 강도가 높고 어떤 기후 조건에서도 버틸 수 있는 반영구적인 재목이다. 프리부츠는 인간의 번식력과 맞먹는 능력을 갖추고 있는 종으로 알려져 있다. ‘Avarus subst’는 프리부츠의 라틴어 이름이다. ‘탐욕스러운 늙은이’ 혹은 ‘색정광’이란 뜻인데, ‘저열한 사기꾼’이나 ‘밀고자’라는 의미도 있다. 원산지인 폴란드에서는 ‘인간의 욕심과 비견할 게 있다면 오직 프리부츠뿐’이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였다. 1960년대 폴란드 오시비엥침(Oświęcim)의 프리부츠 숲은 ‘올빼미의 무덤’이라고 불렸다. 올빼미는 당시 폴란드 레지스탕스의 별칭이었다. 그들은 민주주의로 투신한 동료들의 배신으로 프리부츠 숲에 묻혔다. 스산한 별칭 때문인지 사람들은 프리부츠 숲을 터부시했다.
- 지그문트 헨슬로우, 《인류사와 숲의 연대기》,〈숲의 레지스탕스 프리부츠〉중에서
12월 3일 10시. 부둣가에는 이끼가 달라붙은 목재와 부패한 어패류들이 너저분하게 널려 있다. 한동안 바다를 내다보던 노인은 손에 든 레밍턴으로 먼바다를 가리킨다. 연갈색 총신에 무수한 흠집이 나 있는 레밍턴이 노인의 손짓에 따라 흔들거린다. 그는 일흔 살쯤 돼 보인다. 구부정하지만 굵은 골격과 190을 상회하는 키 때문에 나는 노인에게 항상 주눅이 들어 있다.
“해가 지면 비바람이 몰아치겠어.”
노인이 총구를 끄덕이며 말한다. 나는 총구가 가리키는 방향을 본다. 광활한 바다 위에는 볼티모어 특유의 먹구름이 떠 있을 뿐이다. 노인의 예측은 틀린 적이 없으므로 나는 고개를 천천히 주억거린다.
“자네 모국은 어디 있는가?”
노인이 무언가를 더 선명히 보려는 듯 눈을 가늘게 뜨며 묻는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 바다를 향해 곤두박질치는 바닷새 한 마리가 보인다.
“먼 곳입니다. 여기에서 안 보입니다.”
나는 대답한다. 노인은 짐짓 고개를 끄덕이더니 숲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나는 그의 뒤를 따른다. 숲에 진입하자 허공이 보이지 않을 만큼 빽빽한 프리부츠들이 솟아 있다. 줄기마다 벌목을 예고하는 빗금이 새겨져 있다. 사방에 쓰러져 누운 프리부츠 장벽은 성인 남자보다 크고 누운 길이가 20여 미터에 이른다. 그 장벽에서 어린 프리부츠들이 자라나고 있다. 그곳을 지나치자 프리부츠에게 양분을 빼앗겨 깡마른 잎갈나무가 몽비앙 덩굴에 휩싸인 채 듬성듬성 서 있다. 숲 속 어디선가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프리부츠를 자르고 있는 벌목공들이 저 멀리 희미하게 보인다.
볼티모어를 헐값에 손에 넣은 노인은 재빨리 프리부츠를 거둬내 이곳을 관광지로 만들고 싶어 했다. 오십여 명이던 벌목공들은 프리부츠에 깔려 죽거나 행방불명돼 지금은 여섯 명만 남아 있다. 벌목공들은 요새 노인에게 불만을 표하는 모양이었다. 인력 보충, 임금 인상, 창녀 제공. 이 세 가지가 벌목공들의 요구사항이었다. 여기까지가 내가 노인에게 귀에 박히게 들은 것이다.
“이제 배가 불러서 그래. 절을 해도 수천 번은 해야지.”
노인은 프리부츠 사이에서 몸을 놀리고 있는 벌목공들을 보며 투덜대기 시작한다. 나는 노인의 말을 흘려들으며 주변을 살핀다. 내게 이곳은 보물창고이다. 프리부츠 숲 속에는 도감에서만 봤던 값비싼 지의류들이 수두룩하다. 저기 프리부츠 밑동을 뒤덮은 이끼 틈에 을라(鳦蘿) 군집이 보인다. 을라는 무성한 이끼 사이에 그 푸른빛이 감도는 모습을 꼭꼭 감추고 있다. 학계에서 을라는 청연화(靑煙花)라고 불릴 만큼 진귀했다. 을라는 나무의 양분을 빨아 먹는 지의류이다. 을라를 품은 프리부츠는 다른 프리부츠보다 삐쩍 말라 있다. 〈지의류의 보호본능에 대한 적격판단〉의 좋은 예가 될 것이다. 나는 노인에게 을라의 가치에 대해 설명한다.
“저 지저분한 이끼가 그렇게 비싼 건가?”
노인은 이렇게 중얼거린다. 나는, 을라는 이끼가 아니라 아주 진귀한 식물이라고 말한다. 노인이 흥미를 보이더니 을라를 향해 다가간다. 볼티모어에서 내가 하는 일은 돈이 될 만한 지의류를 선별해주는 것이다. 산티아고 대학 연구원으로 쫓기듯 유학 와 있는 나를 노인이 고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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