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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6.10 09:52 수정 : 2014.06.12 10:04

오한기 소설 <5화>



12월 7일 9시. 난로가 미미한 열기를 퍼뜨리고 있다. 나는 난로 곁에 놓인 의자에 앉아 노인을 보고 있다. 노인은 창가에 걸터앉아 가죽띠로 면도날을 벼르는 중이다. 쉴 틈 없이 움직이는 그의 오른손 끝은 마모된 것처럼 문드러져 있다. 사흘에 한 번 아침을 먹은 뒤 노인은 덥수룩하게 자라 있는 내 수염을 면도해준다. 노인은 젊은 시절 이발사였다고 한다. 오늘은 목재를 싣기 위해 배가 들어오는 날이고, 나는 볼티모어에 들어온 이래 배를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나는 배가 창밖에 정박하기라도 한 듯 창을 내다본다. 창 너머로 묵직하고 흐린 하늘이 보인다. 톱날이 끈질기게 프리부츠를 파고드는 소리가 들린다. 프리부츠는 곧 총에 맞은 것처럼 단말마를 내뱉으며 쓰러질 것이다.

“사람도 빨아 먹을 수 있는가?”

노인이 면도날에 시선을 못 박은 채 묻는다. 나는 갑작스러운 질문에 영문을 몰라 무슨 말이냐고 되묻는다. 노인은 을라가 사람에게 해를 입힐 수도 있느냐고 묻는다.

“벌목공들에게도?”

노인이 연이어 물으며 면도날을 햇빛에 비춰본다. 무심해 보이지만 대답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불현듯 노인과 설전을 벌이던 벌목공들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간다. 나는 쉽게 말해 을라가 필요로 하는 양분이 사람에게는 없다고 대답한다.

“벌목공들에겐 아마 총을 쏘는 편이 빠를 겁니다.”

나는 레밍턴을 흘끗 보며 대답한다.

“도대체 쓸모가 없군.”

노인이 뇌까린다. 그때 소녀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수건을 들고 주방에서 나온다. 자리에서 일어난 노인은 내 턱과 인중에 하얀 거품을 묻히기 시작한다. 수염이 잘리는 동안 소녀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를 본다. 나는 소녀가 조금만 더 크면 아주 예쁠 거라고 생각한다. 노인은 다시 벌목공들의 험담을 하기 시작한다. 나는 인질이 된 것처럼 꼼짝 않고 그의 이야기를 들어준다.

“구에로.”

별안간 노인의 입에서 나온 낯익은 단어가 귀에 들어온다.

12월 7일 10시. 나는 어느 순간 선잠에서 깨어난다. 그동안 면도는 끝나 있다. 꿈결에 맨폴필드로 가득한 숲을 거닐었던 것 같다. 뜨거운 수건이 얼굴에 닿아 있는 게 느껴진다. 수증기 사이로 내 얼굴을 매만지는 소녀가 어렴풋이 보인다.

12월 16일 11시. 벌목공 하나가 프리부츠에 깔렸다.

12월 17일 8시. 청어 조림 조리법은 간단하다. 우선 내장을 빼낸 청어를 바닷물 속에 반나절 동안 담가놓는다. 다시 반나절 동안 햇빛에 건조시킨다. 마지막으로 일미아드 열매를 빻아 만든 매콤한 가루를 첨가해 조린다. 처음엔 특유의 비린내와 투박한 모양에 비위가 상했지만 이제는 적응이 돼 문제없다. 한 가지 문제는 아침을 먹는 내내 노인의 입이 쉬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도 노인은 자신이 건설할 볼티모어의 미래에 대해 끊임없이 지껄이는 중이다. 나는 노인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면서 청어 조림을 떠먹는다. 어느 순간 오늘따라 볼티모어가 조용하다는 걸 감지한다. 볼티모어의 일부가 된 벌목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이다.

12월 17일 10시. 나는 평소처럼 노인을 따라 부둣가로 향한다. 부둣가에 가까워지자 장송곡처럼 처연한 노래가 들리기 시작한다. 나는 앞서 나가는 노인에게 무슨 소리냐고 묻는다. 자리에 멈춰 선 노인이 대답 대신 레밍턴으로 나뭇가지를 헤친다. 그러자 부둣가가 내다보인다. 거기에는 벌목공들이 모여 있다. 노인은 고갯짓으로 그들을 가리킨다.

벌목공들은 노래를 부르며 프리부츠 통나무로 뗏목을 엮고 있다. 나는 노인의 눈치를 살핀다. 노인은 여유롭게 그들을 감상하고 있다. 뗏목은 곧 완성된다. 벌목공들은 어제 죽은 벌목공의 시체를 숲 속에서 가져 나와 능숙하게 프리부츠 잎사귀로 동여매고 뗏목 위에 얹는다.

“저 우스꽝스러운 게 바로 저들의 장례식이야.”

노인이 낄낄대며 말한다. 벌목공들은 먼바다를 향해 뗏목을 밀기 시작한다. 노인은 총을 장전한 뒤 애도하듯 허공을 향해 발포한다. 총성에 놀란 큰부리새 몇 마리가 숲을 벗어나 우중충한 하늘로 날아오른다.

12월 26일 3시.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유리 파편들이 날아든다. 나는 머리를 감싸 안는다. 따끔한 것들이 목덜미에 닿는다. 눈을 떠보니 주먹만 한 돌들이 침대 위에 널려 있다. 노인의 고함과 소녀의 비명이 들린다. 언제부턴가 기괴한 소리도 가까이에서 들려오고 있다. 나는 고개를 쭉 빼고 창밖을 내다본다. 벌목공들이 낄낄대며 서 있다. 그들의 손에 윙윙거리며 돌아가는 전기톱이 들려 있다. 그때 총성이 들린다. 잠시 사위가 고요해진다. 벌목공 하나가 쓰러진 채 부들부들 떨고 있다. 노인이 욕설을 내뱉는다. 나머지 벌목공들은 숲으로 뒷걸음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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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오한기의 <볼티모어의 벌목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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