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한기 소설 <6화>
12월 29일 8시. 잠에서 깨어난다. 누군가 나를 흔들어 깨운 것 같았지만 곁에 아무도 없다. 소녀일 거라고 짐작할 뿐이다. 볼티모어는 고요하기 그지없다. 26일 새벽 벌목공 중 하나가 노인의 총에 죽은 뒤 한동안 벌목 소리가 들리지 않고 있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식당에 들어선다. 노인은 술을 마시고 있다. 나는 노인을 일별하곤 자리에 앉는다.
“프리부츠든, 벌목공들이든, 둘 중 하나만이라도 없으면 속 편히 죽을 수 있겠어.”
노인이 술 냄새를 풍기면서 지껄인다.
“자네도 볼티모어에서 무언가 가져갈 생각은 아니겠지?”
노인이 말한다. 맨폴필드를 손에 넣는 순간 나는 프리부츠의 양분이 될지도 모른다.
1월 15일 자정. 나이테를 따라 도는 사슴벌레처럼 회중시계의 초침이 느릿하게 움직인다. 창밖에서 바람이 볼티모어를 훑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지의류의 보호본능에 대한 적격판단〉을 구상 중이다. 나는 지의류의 두 가지 특성에 주목했다.
· 지의류가 극지에 주로 서식하는 건 경쟁 대상인 관속 식물들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 지의류 중 일부는 무기물과 양분뿐만 아니라 독성 물질도 구별하지 않고 흡수한다.
맨폴필드의 변화무쌍한 색과 레이먼드의 죽음에 그럴듯한 의미를 덧씌우면 지의류의 악행을 증명할 논문을 효과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자 맨폴필드가 볼티모어에 있다는 확신이 생긴다. 문득 관자놀이에 차디찬 레밍턴의 총구가 닿은 느낌이 든다.
1월 17일 2시. 낯선 발소리가 삐걱거리며 마룻바닥을 울린다. 속닥대는 말소리도 들린다. 나는 눈을 뜬다. 사위가 먹지처럼 새까맣다. 문밖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 나는 노인을 위협하는 벌목공을 상상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거실로 나가자 노인과 벌목공 하나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게 보인다. 160 정도의 땅딸한 몸에 입술이 뒤틀린 언청이 벌목공이다. 생각과는 달리 그들은 싸우고 있는 거 같지 않다. 그때 인기척을 느꼈는지 그들이 이야기를 멈춘다. 벌목공이 나를 노려보곤 소녀의 방으로 들어선다. 소녀의 비명이 들린다.
“깼어?”
의자에 한껏 몸을 젖혀 앉은 노인이 태연자약하게 말한다. 노인의 다리 사이에는 레밍턴이 끼워져 있다. 나는 비명이 이어지는 방을 가리키며 영문을 묻는다. 노인은 레밍턴을 짚고 일어나 허리를 곧게 편다. 다시 한 번 자지러지게 날카로운 비명이 터져 나온다. 그 비명은 내 손을 문고리에 얹어놓는다.
“놔둬.”
노인의 날 선 목소리가 나를 제지한다. 소녀가 노인의 소유물이라는 게 머릿속에 스쳐 지나간다. 수전노 노인이 순순히 소녀를 내줄 리 없다. 밤중에 들이닥친 침입자를 묵인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짐승끼리니까 상관없어.” 노인이 내게 총을 겨눈다. 레밍턴의 깊숙한 총구가 보인다. 나는 문고리에서 손을 떼고 뒤로 물러난다. 대치 상태가 지속되는 동안 비명은 잦아든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벌목공이 방에서 나온다. 문틈으로 담요에 몸을 묻은 소녀가 보인다. 벌목공은 나를 거칠게 밀치더니 볼티모어의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1월 20일 3시. 언청이가 소녀의 방으로 들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살며시 침대에서 일어나 가옥 밖으로 나온다. 숨을 죽이고 외벽에 붙어선 채 소녀의 방에 뚫린 창을 넘어다본다. 촛불을 밝혀놓은 소녀의 방 안은 몽환적이다. 나체가 된 소녀는 낡은 탁자의 모서리를 잡고 있다. 언청이가 그 뒤에서 허리를 움직인다. 소녀의 풍만한 젖가슴이 출렁거린다. 언청이는 잘 보이지 않지만 소녀의 얼굴은 기이하게 또렷하다. 그녀의 눈에는 초점이 없다. 문득 창 너머의 나를 보는 것 같아 섬뜩한 기분이 든다. 나는 벽에 기대 주저앉는다. 바람이 휘몰아친다. 프리부츠 숲이 바람을 타고 이리저리 흔들린다. 볼티모어의 밤은 소란스럽다.
1월 24일 2시. 맨폴필드 생육지는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언덕이나 파랑의 영향이 적은 조간대(潮間帶) 지역이다. 나는 숲 동편의 기이하게 생긴 바위와 프리부츠 줄기들이 쌍떡잎식물의 그물맥처럼 엉켜 있는 곳을 살피고 있다. 그러나 랜턴이 비추는 건 바위에 들러붙은 말라무트 이끼 군집뿐이다. 랜턴 불빛 안에 누군가의 발이 들어온 건 정신없이 화강암 바위를 헤집고 있을 때였다. 랜턴을 위로 올리자 누군가가 눈이 부신지 얼굴을 팔로 가린다. 자세히 살펴보니 온몸에 피가 흥건한 언청이다. 그의 발치에 벌목공의 시체가 보인다. 언청이의 손에는 피에 젖은 단도가 하나 들려 있다. 나는 뒤로 서서히 물러난다.
“구에로.”
그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리곤 평소와는 달리 힘없이 내 곁을 지나쳐간다.
1월 27일 15시. 벌목공 : 3. 언제부턴가 다시 조그맣게 벌목 소리가 들린다.
1월 28일 1시. 1951년 윈스턴 처칠은 벌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름다운 나무들을 베어 시답잖은 소리만 지껄이는 신문을 찍어내는 것이 바로 문명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해 영국 신문에 가장 많이 언급된 명사는 바로 처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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