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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6.12 09:59 수정 : 2014.06.25 10:20

오한기 소설 <7화>



1월 29일 17시. 노인은 초저녁부터 술에 취해 잠든다. 나는 노인 몰래 가옥을 빠져나온다. 어디선가 끊임없이 나무를 베는 소리가 들린다. 태양이 먹구름 틈으로 뉘엿뉘엿 지고 있다.

화강암 언덕에 오르니 섬의 전경이 내려다보인다. 노인의 계획대로라면 헐벗은 푸에스티오 산과 숲의 동편 일부는 각각 골프장과 생태 공원이 될 것이다. 호텔이 들어설 섬의 서편, 부둣가에서부터 숙소 방향으로 펼쳐진 숲의 일부가 휑뎅그렁하다. 벌목된 곳은 실상 전체 숲의 10퍼센트에도 못 미친다. 나는 오른쪽으로 열 발자국 정도 떨어진 바위를 살펴보려고 자리를 옮긴다. 세균성구멍병에 걸린 오얏나무 잎처럼 갖가지 크기의 구멍이 뚫린 화강암 바위 위는 맨폴필드는커녕 이끼조차 없이 반들반들하다. 그때 딱 하고 나뭇가지 같은 게 부러지는 소리가 들린다. 칼을 든 벌목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누군가 내 어깨를 두드린다. 나는 돌아선다. 소녀다. 태양이 뒤에 있는 덕분에 소녀의 부푼 실루엣이 위협적으로 보인다. 제단 위에 피가 줄줄 흐르는 양 따위를 올려놓고 머리를 조아리는 밀갈토의 미개한 풍습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간다. 어느새 내 안에 공포가 자리 잡는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뒷걸음친다. 소녀가 고개를 갸우뚱한다. 그리고 바다를 가리킨다. 나는 뒷걸음질만 친다. 소녀가 답답한지 인상을 찌푸린다.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바다를 바라본다. 해가 담긴 바다가 피로 물든 것처럼 붉다. 소녀가 바다에 뛰어드는 시늉을 한다.

“밖에 내보내달라고?”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묻는다. 소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신의 음부를 손으로 가리킨다.

“탈출을 도와주면 자주겠다고?”

내가 다시 묻는다. 소녀는 울 듯한 표정으로 계속해서 자신의 음부를 가리킨다. 나는 고개를 젓는다. 볼티모어에서 버젓이 나갈 수 있는 건 프리부츠 목재뿐이다. 별안간 소녀가 내 손을 잡아끈다. 소녀를 따라 언덕 밑의 해안으로 내려간다.

삽시간에 사라진 해를 대신해 땅거미가 몰려온다. 저 멀리 앞서 나간 소녀가 해안가 쪽을 가리키고 있다. 그 방향에 대여섯 사람이 탈 만한 목조 난파선이 어슴푸레하게 보인다. 꽤 오랫동안 방치돼 있던 모양인데도 상태가 좋아 뱃머리만 손본다면 본토까지 갈 수 있을 것이다. 나와 소녀가 목조선에 탄 채 유유히 볼티모어를 벗어나는 장면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나는 내 손에 들려 있는 맨폴필드를 상상한다. 문득 볼티모어에 익숙한 소녀라면 맨폴필드에 대해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치켜든다. 나는 소녀에게 맨폴필드에 대해 묻는다. 그러나 소녀는 대답 대신 몸짓을 멈추고 멀뚱멀뚱 서 있을 뿐이다. 나는 허공에 별 모양을 그린 뒤 해안가의 화강암 바위를 가리킨다.

“케사르?”

소녀는 이렇게 물으며 허공에 별 모양을 그린다. 그리고 해안가를 가리킨다. 케사르는 아마 지의류를 일컫는 토속어일 것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소녀가 흰 이를 드러내며 웃는다.

1월 30일 4시. 수미부와 늑골이 파손됐지만 조타기는 쓸 만하다. 내가 선체 구석구석을 살피는 사이 소녀는 옆에서 멀뚱거리며 서 있다. 불현듯 소녀가 진짜 맨폴필드를 아는 건가 불안해진다. 나는 허리를 펴고 소녀를 본다. 소녀도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케사르?”

소녀에게 묻는다. 소녀는 허공에 별 모양을 그리며 걱정하지 말라는 듯 웃음 짓는다. 나는 허공에 그린 별처럼 맨폴필드가 곧 사라질 것 같아 불안하다. 거센 파도가 저 멀리서부터 발밑까지 밀려온다.

2월 3일 9시. 노인은 창가에 걸터앉아 밖을 내다보고 있다. 인사를 건넸지만 노인은 본 척 만 척한다. 나는 식당으로 들어간다.

“무슨 꿍꿍이지?”

노인의 목소리가 나를 멈춰 세운다.

2월 5일 15시. 언청이도 보이지 않는다. 벌목공들이 몇 명 남았는지 알 수도 없다. 아주 조그맣게 들리는 벌목 소리로 그들의 생존을 확인할 뿐이다.

2월 9일 5시. 새벽녘의 청회색 빛깔이 볼티모어를 뒤덮고 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린다. 선체는 비에 젖어 까맣다. 나는 선미의 파식된 부분에 미리 잘라온 프리부츠 통나무를 덧대어 못을 박아 넣는다. 소녀는 옆에서 선체에 달라붙은 이끼를 제거하고 있다. 비에 흠뻑 젖은 옷 위로 소녀의 굴곡진 몸매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소녀의 표정은 프리부츠 숲 속처럼 그늘져 있다. 나는 보다 못해 언청이가 아직도 괴롭히느냐고 묻는다.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소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뒤 곧 울 것 같은 표정을 짓는다.

해가 떠오른다. 볼티모어는 제 색을 되찾는 중이다. 날이 밝자 노인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거 같다. 조급해진 나는 소녀에게 맨폴필드에 대해 묻는다.

“케사르?”

소녀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무언가를 꺼내 내게 건넨다. 까끌까끌한 촉감이 손아귀에 가득하다. 고약한 냄새가 올라온다. 손을 펼치자 불가사리가 보인다. 부둣가에 널려 있던 썩은 불가사리다. 나는 한참 불가사리를 본다. 소녀는 내 반응이 이상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한 뒤 노인이 깰 시간이라며 서둘러 발걸음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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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오한기의 <볼티모어의 벌목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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