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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6.13 09:48 수정 : 2014.06.25 10:21

오한기 소설 <8화>



2월 9일 7시. 동이 터올 무렵 숙소에 다다른다. 노인이 차갑게 식은 난로 곁에 앉아 있다. 손에는 술잔이 들려 있고 발치에는 레밍턴이 기대 서 있다. 햇빛이 노인과 레밍턴 사이에 비스듬히 걸쳐 있다.

“어디 갔다 왔나?”

노인이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묻는다.

“산책 좀 하고 왔습니다.”

나는 잠시 머리를 굴리다가 대답한다. 소녀의 방문은 굳게 닫혀 있다.

2월 11일 3시. 맨폴필드는 곤충을 잡아먹기 위해 독성을 활용하는 파리지옥이나 사라세니아와는 달리 가근에 대기에서 흡수한 독성 물질을 모아둔다. 맨폴필드의 독성은 섬유공장의 매연과 유사한 성분을 지녔다. 산업혁명 이전에 채집된 맨폴필드에는 독성이 없었다.

- 레네 아들러, 《태생의 죄악, 그리고 죽음으로부터의 해방》 중에서


2월 12일 8시. 아무리 기다려도 소녀가 오지 않는다. 작지만 집요한 벌목 소리가 나를 깨운다.

2월 12일 9시. 거실로 나가자 노인은 레밍턴을 손질하고 있다. 간단한 손놀림에 레밍턴은 뼈대를 드러낸다. 겉가죽과는 달리 레밍턴의 속은 허하다.

청어 조림이 식탁 위에 차려져 있을 뿐 소녀는 보이지 않는다. 나는 대충 요기를 한 뒤 식당을 벗어난다. 노인은 여전히 총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자네 수염이 많이 자랐군.”

노인이 레밍턴의 뼈대를 헝겊으로 문지르며 고갯짓으로 의자를 가리킨다. 바닥에 길게 드리워진 레밍턴의 그림자가 노인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덩달아 꿈틀댄다. 나는 공포를 숨긴 채 수염이 수북한 턱을 쓰다듬으며 의자에 앉는다.

“배는 쓸 만한가?”

노인이 빈정댄다. 노인의 손가락이 방아쇠에 닿기라도 한 듯 가슴이 철렁한다. 나는 노인의 해코지로 피투성이가 된 소녀를 상상한다.

“그렇게 조그만 배로는 힘들지 않겠어?”

노인이 분해했던 부품을 하나씩 끼워 맞추며 말한다. 나는 어떻게 대꾸해야 할지 몰라 노인을 바라본다. 입꼬리를 올린 품이 웃는 건지 찡그린 건지 헷갈린다. 그사이 레밍턴은 점차 위용을 되찾고 있다.

“돌아가고 싶으면 내게 말을 하지 왜 힘들게 그래? 누가 자네를 가두기라도 했어?”

노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재조립된 레밍턴을 이리저리 훑어본다.

“아무리 일찍 일어나도 해는 뜨지 않는다. 우리 속담 중에 이런 게 있어.”

노인이 자신의 말에 장단이라도 맞추듯 개머리판으로 바닥을 쿵쿵 찧는다. 속담의 뜻을 생각하는 동안 노인은 소녀의 방을 향해 그들의 언어로 외친다. 소녀가 겁에 질린 듯 주춤거리며 나온다. 소녀는 프리부츠에 뭉개진 것처럼 피투성이다.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다는 뜻이지.”

노인이 말을 잇는다. 소녀는 넋이 나간 표정이다.

“아니 어쩌면 볼티모어처럼 흐린 곳에는 영원히 해가 뜨지 않을지도 모르지.”

노인이 히죽댄다. 노인이 말을 하는 사이 소녀가 비명을 지르며 문을 향해 달려나간다. 노인이 소녀를 향해 총구를 치켜들며 “구에로”라고 읊조린다. 나는 낯익은 그 단어에 포박당한 듯 움직이지 못한다. 노인이 총구를 천천히 움직여 발포한다. 귀를 막을 틈도 없이 사라진 총성의 여운이 이명이 돼 돌아온다. 정신을 차리자 노인이 벌목된 나무처럼 쓰러져 있는 소녀를 향해 알아듣지 못할 말을 지껄이고 있다. 소녀의 목에서 피가 꾸역꾸역 올라온다.

“도둑고양이처럼 내 방을 뒤지고 있더군. 역시 밀갈토는 쓸모가 없어.”

노인이 얼굴에 묻은 피를 닦으며 실실댄다. 그리고 내게 천천히 다가온다. 노인은 주머니에서 면도날을 꺼내 내 턱에 댄다. 면도날이 금세라도 목을 파고들 것 같다. 서서히 살갗을 파고들던 면도날이 멈춰 선다.

“그래, 자네가 원하는 건 어디 있지?”

노인이 내 귓가에 대고 속삭인다. 나는 눈을 감는다. 프리부츠 숲에 갇힌 벌목공들의 외침이 들린다.




(이상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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