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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6.20 18:58 수정 : 2014.06.22 14:20

[토요판] 이서희, 엄마의 도발

2주째 아이들을 데리고 이탈리아를 여행하는 중이다. 날마다 강행군이다 보니 다리가 퉁퉁 붓고 발바닥에는 물집까지 생겼다. 아이들을 달래는 데에도 도가 텄다. 피로함을 표시하는 말로 우리는 배터리가 떨어졌으니 충전이 필요하다는 표현을 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서로 배터리의 충전 수준을 보여주며 누구든 레벨이 무릎 밑으로 내려가면 쉴 곳을 찾아 휴식을 취하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 많은 것을 보여주고 들려주려는 나의 노력과는 달리 아이를 즐겁게 하는 것은 관광명소의 인상적인 외관이나 역사적 배경보다는 빵 조각을 보고 달려드는 비둘기 떼나 뜻밖에 쏟아지는 빗속을 신발이 젖을 때까지 뛰어다니는 일이다.

베네치아의 산마르코광장에서는 해가 질 때까지 몇 시간을 뛰어놀았다. 노천카페의 악단들이 번갈아 연주를 이어갔고 아이들과 음료수를 마셨던 나는 자리에 남아 와인 한 잔을 더 시켰다. 와인은 내게 선사하고 함께 나오는 비스킷은 아이들 손에 조금씩 쥐여줬다. 낯가림을 금세 극복한 비둘기들은 아이의 손목에 내려앉기도 서슴지 않는다. 손에서 직접 모이를 받아먹기도 한다. 아이는 옆에 있던 잿빛 머리칼의 소년에게 모이를 나눠주며 함께 비둘기 떼와 어울린다. 비둘기 떼처럼 아이들이 조금씩 모여든다. 광장에 어둠이 내려앉으니 마법처럼 불빛이 곳곳에 떠오른다. 젊은 연인의 남루한 차림이 밤의 베일을 입는다. 젊지만은 않은 연인의 주름진 얼굴에 빛이 내린다. 흘러드는 음악에 사람들이 모여들자 어느 은발 노인이 옆 사람의 손을 잡고 몸을 가벼이 흔들기 시작한다. 어느새 수십 명의 사람이 함께 손을 잡는다. 연주가 끝날 때까지 춤을 추며 손을 놓지 않는다.

마법은 생각만큼 오래가지는 않았다. 음식을 계산하고 나서려는데 가격을 물어보니 예상보다 훨씬 많은 액수를 불렀다. 영수증을 요구하자 웨이터는 슬쩍 액수를 내렸다. 그제야 비로소, 이곳의 관광지로서의 악명을 떠올렸다. 값을 치르고 자리에 일어서서 아이들을 불러 숙소로 향하는 길, 방금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며 조금 투덜거렸다. 다른 도시에서 택시를 탔다가 바가지요금을 쓴 경험까지 덧붙였다. 첫째 아이가 대답했다. “엄마, 나는 그 돈이 결국은 꼭 필요한 사람에게 잘 쓰였을 거라고 생각해요.” 돈을 함께 나눠 쓰는 일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니 사소한 손해에는 좀더 여유로운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아이가 비둘기 모이를 다른 아이들과 기꺼이 나누었던 것처럼, 이익분배가 세상의 당연한 이치로 여겨졌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이서희
“어쨌든 엄마 덕분에 모이를 쉽게 구할 수 있었던 것은 운이 참 좋았어요”라고 말하며 아이가 웃어 보였다. 우리는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이를 닦는다. 2분도 넘게 닦았다며 자랑스러워하던 둘째는 그대로 침대에 뻗어 잠이 들었다. 첫째는 여행 일지를 쓴다. 산마르코광장은 그 유구한 역사와 아름다움 대신, 비둘기와 새로 사귄 친구와 함께 보낸 즐거움을 기록하는 배경이 된다. 베네치아를 떠나 다른 도시에 도착하여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는다. 지금까지 돌아본 곳 중 어디가 제일 좋았니? 아이들은 입을 모아 대답한다. 베네치아입니다. 여정은 이렇게 특별한 기억을 입는다. 밤의 부드러움과 광장의 넉넉함과 음악의 너그러움, 널리 밝히는 빛의 고마움을 함께 알았으니 우리는 운이 퍽 좋았다.

11년차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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