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이서희, 엄마의 도발
미국 생활에서 만나 어울리는, 이곳에서 태어나 자란 또래 친구들은 유독 80년대 음악에 열광한다. 내게 체벌과 폭력으로 얼룩진 학교생활로 기억되는 80년대가 그들에게는 가장 애틋한 시절로 남아 있다. 너희처럼 향긋한 80년대를 보내지 못했노라고 공언해 놓고도 나 역시 익숙한 노랫소리를 들으면 절로 리듬을 탄다. 나는 명지대 뒤편을 헤매며 사춘기를 맞이했다. 88올림픽 구호가 휘날리고 호돌이 마스코트가 거리를 덮었지만, 뒷골목으로 들어서면 에로영화 포스터가 넘쳐나는 딴 세상이 펼쳐졌다. 돌이켜보면, 80년대에서 90년대로 넘어가던 나의 사춘기는 시대만큼 격렬했지만, 고통 이후를 상상할 수 있어 희망적이었다. 곧 어른이 되어 갑갑한 골목길을 벗어나 달라진 세상의 한복판에 서 있으리라 꿈꾸었다. 몸과 마음은 알 수 없는 열정으로 달아올랐고 폭죽처럼 타올라서 하늘 저편에 불꽃이라도 그려 넣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세상의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단 하나의 “개인”으로 성장하는 중이라고 믿었다. 지금은 안다. 한국을 떠나 유럽을 돌아 미국에 잠시 정착해 있는 나는, 그 시절의 과잉된 자의식이 얼마나 평범한 것인지를. 그러나 이 또한 안다. 나의 그 시절은 달콤했음을. 그저 달콤할 수밖에 없는 나였고 애써 찡그려봤자 과즙처럼 뚝뚝 떨어지는 달짝지근함으로 주변을 물들였던 사춘기 소녀였음을. 수학여행을 떠난 아이들이 선박과 함께 침몰되었다가 전원 구조되었다는 소식을 믿고 잠자리에 들었던 밤, 아이 방에서 들려오는 쿵 소리에 눈을 떴다. 침대에서 떨어져 칭얼대는 아이를 품에 안고 달랬다. 어느새 넘칠 듯 자랐으나 속절없이 부드러워 내 속으로 또다시 스며들 것 같은 몸. 나날이 자라나는 딸의 모습을 엿보는 엄마는 그 달콤함이 미리 아프다. 자리를 지키라는 지시를 따르던 열일곱살의 아이들은 바닷속에만 있는 게 아니다. 아이가 어른이 될 수 없는 세상이다.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는 시간은 애초에 몰수되었다. 벗어날 세상이 없으리라는 좌절을 속도로 가리는 폐쇄 경쟁사회 속에서 침몰당하는 것은 이 사회의 미래요, 지금 당장을 누려야 할 달콤함이요, 어른을 향한 아이들의 믿음이다. 그럼에도 시절은 달콤하여, 그네들은 다디달았을 것이며 특별했을 것이며 속절없이 무르익고 있었을 것이다. <한겨레>의 기획연재 ‘잊지 않겠습니다’를 읽으며 미처 어른이 되지 못한 아이들의 이름과 얼굴과 특별한 이야기를 마음에 새긴다. 사망자 293명과 실종자 11명이라는 숫자 속에 사라진 개인들을 한 명씩 불러내어 본다. 생명의 탄생이 매번 특별한 것처럼 죽음 또한 그 개별성과 존엄성을 누릴 권리가 있다. 참사와 학살과 전쟁으로 인한 무차별한 죽음에 인간이 분노해야 하는 까닭은, 단 하나뿐인 삶만큼이나 죽음도 그 유일함을 인정받아야 한다는 공감에서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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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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