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이서희, 엄마의 도발
매년 받는 산부인과 정기검진에는 피임도구 상담도 포함되어 있다. 기한이 십년짜리인 자궁 내 피임장치를 결정하니 산부인과 의사가 대답한다. 십년간 착용하고 난 뒤면 폐경기가 될 테니 여러모로 편리하고 좋을 거예요. 검진을 마친 뒤 병원을 나섰는데, 내게 폐경을 말하는 여의사의 담담한 모습이 잔상처럼 어른거렸다. 이제 마흔을 넘겼으니 그럴 법도 한 이야기인데, 구체적 시간으로 다가오니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외모와 젊음의 가치가 재화처럼 통용되고 결혼이 시장 논리로 설명되는 사회에서 여성의 신체시계는 치명적 속도로 흘러간다. 한정된 가임시기를 두고 쫓기듯 결혼과 출산을 결정하기도 한다. 연애의 자유도 흘러가는 시간 앞에서는 한없이 불안한 무엇으로 둔갑한다. 결혼한 이후에도 불안이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서른다섯의 여름을 그 어느 해 여름보다 뚜렷이 기억한다. 결혼과 잇따른 출산, 수유, 육아의 과정으로 정신없이 흘러간 6년, 정신을 차려보니 거울 속에는 낯선 내가 서 있었다. 사랑의 진화와 함께 그 장렬한 몰락 또한 가능함을 알기에 묻고 또 물었다. 나는 남편이 아닌 남자에게도 여자일 수 있는 존재일까. 남편에 대한 사랑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남편만의, 남편만을 위한, 남편만에 의한 여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일까 두려웠다. 결혼 전 극심한 불안감에 시달렸던 내게 결혼생활을 몇 년 앞서 했던 친구가 말했다. 결혼했으니 이혼도 할 수 있는 거야. 네 인생 전체가 결혼에 달린 것은 아니잖아. 벗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이야말로 나의 결혼을 더 용감하게 했고 그 일상을 축복되게 했다. 남김없이 행복했으나, 어느 순간, 양팔에 두 아이를 짊어진 채 희미해진 나를 보며 너무 멀리 나아갔음을 깨달았다. 가족의 행복이 모든 것을 압도했고 나조차 나를 잊은 시간이었다. 그리고 서른다섯의 늦가을, 20대의 마지막 절반을 보냈던 도시로 여행을 떠났다. 마지막날엔 오랜 친구를 만나 거리를 산책했다. 여성의 신체시계의 가차없음을 논하던 나를 두고 그가 말했다. 여성성이 왜 가임 가능성에 좌우된다고 믿느냐고. 피임의 부담 없이 섹스를 즐길 수 있는 그 상태가 얼마나 관능적인지 생각해보지는 않았느냐고. 나는 그의 반문에 뤽상부르 공원 한복판에서 웃음을 터뜨렸다. 그 후 젊지만은 않은 여성으로 살아가는 데에 편안해지는 법을 배워갔다. 돌이켜 보면, 서른다섯의 나는 한창 젊었다. 위태로웠던 이십대와 다르게 아름답게 무르익고 있었음을 이제는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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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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