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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8.29 19:18 수정 : 2014.08.31 13:17

[토요판] 이서희, 엄마의 도발

“엄마, 엘리는 아빠가 두 명이나 된대요. 모두들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몰라요.” 지금은 초등학생이 된 아이가 유치원을 다니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꺼낸 말이었다. 아이가 유치원부터 지금까지 다니는 학교의 학급에는 다양한 형태의 가족이 존재한다. 엘리의 아버지들과 같은 게이 커플, 레즈비언 커플, 이혼 후 양육을 나눠서 하는 가족도 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함께했던 커플이 이혼한 뒤 재혼하거나 각각 애인이 생긴 경우도 있다. 엄마 아빠 아이로 이루어진 가족은 이 학교에서는 일부에 불과하다. 이런 환경에서 아이들은 가족의 개념을 새롭게 배우고 자란다. 가족 간의 결별을 겪고 내부의 문제를 앓을 때면 아이들은 함께 대화를 나누고 공감을 보탠다. 한때 사랑했던 사람들이 헤어졌다고 해서 그들의 지난 사랑의 진정성이 의심되지 않는다. 부모도 아이들도, 때로는 일어나는 관계의 어쩔 수 없음을 함께 인정하고 극복을 시도한다.

반복되는 일부 언론과 네티즌의 태도에서 이혼 가정을 비난하는 시선을 발견한다. 부모의 무책임을 논하면서 파탄 가정에서 자라났을 아이의 고통을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그 고통을 이해하고 감싸주기 위해 당신은 무엇을 하는가? 이혼한 부부를 비난한다고 해서 아이가 떠안을 고통이 덜어지는가? 그와 같은 시선이 아이를 위축되게 하지는 않는가? 이혼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혼한 그들보다 더 큰 도덕적 정당성을 위임받는다고 믿는가? 한 가정이 기존의 양식과 다른 형태로 정착할 것을 시도할 때는 각각의 구성원의 행복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무조건적인 부모의 희생을 요구할 권리는 자식에게마저 없다. 부모 역시 그들의 사랑이 다른 형태로 남기를 선택했을 뿐 자식에 대한 공통의 사랑만큼은 변함없음을 보여줘야 한다. 끝까지 함께 있다고 하여 가정은 더 행복하고 더 안전한 걸까? 내가 결혼한 직후 엄마는 푸념을 늘어놓으셨다. 당신이 지옥 같은 결혼생활을 감내한 이유는 오직 딸들이 알아주는 집안과 결혼할 때 흠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는데, 두 딸이 그와는 상관없는 결혼을 해버렸다고. 나는 엄마에게 대답하고 싶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전부터 부모의 이혼을 바랐던 것을 모르시느냐고. 불행을 삶의 조건처럼 여기고 사는 엄마의 일상이 딸의 내면을 얼마나 비참하게 만드는지 아시느냐고. 불행을 자각하는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고 마땅히 순응해야 할 조건으로 받아들이는 삶, 무한한 인내심을 미덕으로 아는 삶을 딸들에게 가르치고 싶으셨냐고. 엄마는 십여년 전에야 비로소 이혼을 감행하셨다. 그리고 지금 나는, 자신과 가족에게 찾아온 고통에 저항하고 그 진실을 규명하고자 노력하는 이혼한 아비의 노력에 더 배우고 감사하는 것이다.

이서희
한 아이를 키우는 데는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요즘은 종종 한 아이를 고통스럽게 하는 데에 나라 전체가 들썩인다는 생각마저 들기도 한다. 제대로 키우지 못한 아이들을 찬 바닷물에 수장한 것도 모자라 참척의 고통에 식음을 전폐한 제 아비의 진심마저 검증하도록 남은 아이를 궁지에 몰아넣기도 한다. 300여명의 죽음을 천천히 생중계하던 언론이 이제는 굶어죽는 아비마저 속지 말고 바라보라 한다. 죽은 자도 살아남은 자도 얼마나 더 불행해야 이 시절은 끝이 나는가. 어느새 봄을 한참 지나 가을이 오고 있다.

11년차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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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토요판] 이서희, 엄마의 도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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