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이서희, 엄마의 도발
이번 여름 한국 방문 중 아이들이 그토록 원하던 귀뚫기를 감행했다. 친한 교포 가족을 만나 어울리다가 귀걸이 한쪽이 떨어져나간 것을 나중에야 깨달은 첫째는 친구들과 놀이터를 뒤졌지만, 사라진 금색 귀걸이를 모랫바닥에서 발견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리고 종종 불행의 사소함은 반복적이다. 복도를 조잘대며 지나가는 아이들에게 시끄럽다고 고함을 질러대는 어느 할아버지를 보고 아이는 울음을 터뜨렸다. 집에 가고 싶다고. 한국이 싫다고. 옆에 있던 친구가 질문을 던졌다. 집이란 어디에 있는 걸까. 다른 친구가 대답했다. 집이란 마음이 있는 곳이지(Home is where the heart is). 나는 그들에게 되물었다. 그렇다면 마음은 언제 태어나서 어디에 있는 걸까. 20년의 세월 동안 고향을 찾아 떠돌던 오디세이의 여정을 생각하다 문득, 내가 고향을 떠난 지 18년이 넘었다는 사실에 등골이 서늘해진 적이 있다. 떠나던 자는 과연 돌아오는 자의 시간을 가늠할 수 있었을까. 젊음을 들고 나선 여행에서 모든 것을 소진하고 돌아와 결국은 죽음/귀환으로 안착하는 시간이야말로 20년이 아니었을까. 집(자궁)을 떠나 세상으로 나온 순간은 영원히 기억하지 못하여, 우리의 고향은 언제고 돌아갈 수 없는 곳이며 애초에 다시 들어설 수 없는 곳이다. 잠시 어미의 몸을 빌렸달 뿐, 어미는 아이를 키운 집 세간(태반)을 출산과 함께 핏덩이로 내버린다. 우리는 태어남과 동시에 집을 잃는다. 나는 돌아갈 수 없지만, 나의 형제는 들어설 수 있는 곳, 이곳을 과연 나의 집이라 부를 수 있던가. 모성은 도무지 충족될 수 없는 욕망처럼 우리를 비껴갈 뿐이고 떠도는 환영처럼 감미롭되 존재와 비존재를 오갈 뿐이다. 나의 친애하는 동포 친구가 대답한다. 마음은 엄마가 있는 곳이고, 너희들의 집은 바로 엄마가 있는 곳이라고. 그녀의 말에는 분명 위안이 있다. 나는 여전히 불만에 가득 찬 첫째의 눈을 바라보며 대답한다. “자신의 말과 습관이 형성된 곳을 떠나 지낸다는 건 어려운 일이야. 네가 태어난 미국을 떠나 낯선 한국이란 환경에 적응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엄마는 누구보다 잘 이해해. 엄마는 그런 생활을 벌써 18년째 하고 있거든. 나의 언어로 말하고 듣고 웃는 행복을 일상에서 지워버린 지 오래되어서 이제는 까마득할 지경이야. 가끔은 체한 듯이 슬픔이 심장 가운데에 얹혀서 가라앉을 기미도 보이지 않아. 엄마는 너희들에게 엄마의 나라에 평생 살아달라고 요구하는 건 아니야. 엄마의 이 느낌을 조금만 이해해주기를 바랄 뿐이지. 그래도 한 가지만 알아줘. 나의 마음은 너희들이 있는 곳에 있어. 그렇지만, 그곳이 나의 고향이 되지는 않을 거야. 엄마에게도 엄마가 있었고 그 엄마에게도 또 엄마가 있었고, 어쩌면 누구나 도무지 닿을 수 없는 곳에 고향이 있다고 느끼며 사는지도 몰라. 여행이 좋은 이유는, 그 결핍의 당연함에 익숙해지는 여정이기 때문이기도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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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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