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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7.11 18:28 수정 : 2014.07.12 13:10

일본 드라마 <더 쇼핑 트립>

[토요판] 김선영의 드담드담
일본 드라마 <더 쇼핑 트립>

한적한 시골에서 단조로운 일상을 살아가던 노부부 앞에 어느 날 편지 한 통이 도착한다. 도쿄에서 열리는 ‘세계의 중고카메라’ 전시행사 안내였다. 젊은 시절 카메라를 좋아했던 할아버지(구메 아키라)는 아마도 생애 마지막이 될 도쿄행을 결심하고, 만류하던 할머니(와타나베 미사코)도 여행에 동참한다.

일본 <엔에이치케이>(NHK)에서 2009년 방영된 단편드라마 <더 쇼핑 트립>은 오즈 야스지로의 <동경 이야기> 속 노부부의 일상을 뚝 떼어내 좀더 환한 수채화로 채색한 듯한 작품이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방석 대화 장면이나, 사물의 풍경을 여백처럼 끼워 넣는 화면도 오즈 야스지로 특유의 숏을 연상시킨다. 고속열차 안에서 방금 전 물건 둔 곳을 잊어버리고는 서로에게 책임을 묻는 장면처럼 <동경 이야기> 도입부의 직접적인 인용도 있다.

무엇보다 오즈 야스지로의 잔향이 도드라지는 점은 소소해 보이는 일상이 지닌 풍부한 함의다. <더 쇼핑 트립>에는 극적 사건이 존재하지 않는다. 늘 같은 자리에 앉아 있는 할아버지의 모습처럼 노부부의 일과는 주로 텔레비전을 보고 밥 먹는 일로 채워진다. 하지만 그 단조로운 일상을 묵묵하고 꾸준하게 응시하는 카메라에 적응하게 되면 그때부터 부부의 이야기는 그 어떤 극적 갈등보다 크나큰 정서적 반향을 일으킨다.

가령 거의 움직임이 없는 카메라가 한걸음 떼기조차 힘겨운 노인들의 느릿한 동작과 일치할 때, 혹은 노인의 시력을 그대로 반영해 초점을 희미하게 흐릴 때, 이 밋밋해 보이던 이야기는 일상의 한 단면이 아니라 전 생애를 거쳐온 무게 있는 시간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여행 대비 체력단련으로 산책을 감행한 할아버지가 마침내 동네 신사의 계단을 다 오르는 장면이나 도쿄의 카페에서 오랜 시행착오 뒤 주문에 성공하는 장면이 서스펜스 영화 못지않은 긴장감을 주는 것도 그 때문이다.

김선영 티브이 칼럼니스트
드라마가 느릿하지만 묵직하게 쌓아올린 정서적 공명은 노부부가 도쿄역 앞에서 사진을 찍는 장면에서 절정에 이른다. 부부는 오래전 와봤던 도쿄 여행에서 번화한 도시 풍경에 넋을 잃었던 기억을 떠올린다. 지방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소외감과 혼란스러움 앞에서 당황하는, 지금보다 젊은 그들이 서 있던 자리를 바라보며 노부부는 가만히 서로의 손을 잡는다. 낡은 도쿄역이 곧 개축될 것이라는 소식은 그 황혼의 풍경에 짙은 페이소스를 더한다. <동경 이야기>에서 노부부가 목격했던 전후 일본의 분주함 뒤 쓸쓸한 정서가 2000년대의 드라마 안에서 그렇게 겹쳐진다. 공교롭게도, 드라마 속 노부부가 거주하던 시골이 2011년 동일본 대지진 이전의 후쿠시마라는 점을 생각하면 더 씁쓸해진다.

<더 쇼핑 트립>은 일본에서 주목받는 극작가이자 소설가인 마에다 시로의 첫 텔레비전 드라마 극본이라는 점에서도 화제가 됐다. 삶과 죽음을 하나의 몸처럼 그려내는 주제와 미니멀리즘에 가까운 특유의 스타일이 단막극이라는 형식 안에서 더욱 잘 압축된 수작이다.

김선영 티브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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