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12.14 19:51
수정 : 2014.06.13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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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윤 수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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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생명
박정윤의 P메디컬센터
복돌이는 2년 전에 입양된 ‘업둥이’였다. 가족들은 진료 차트에 복돌이의 품종을 적을 때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푸들이라고는 하는데 잘 모르겠어요.” 강아지를 처음 키우는 가족들은 푸들보다 덩치도 크고 머리도 큰 복돌이가 다른 애들에 비해 예쁘지 않은지 작고 깜찍한 아이들을 보며 부러워했다. 그러다가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들었다. 복돌이의 품종은 푸들도 몰티즈도 아닌 ‘비숑프리제’라는 것이 미용실장님의 의견이었다. 강아지 품종 사진이 있는 책을 펼쳐 보던 가족들은 얼굴이 상기되어 돌아갔고 그날 이후 복돌이의 인생은 180도 바뀌었다. 털이 너무 빨리 자란다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매번 빡빡이로 미용하던 복돌이는 ‘비숑프리제’에 맞는 가위컷을 하게 되고 털의 윤기 강화를 위해 고급 사료를 먹게 되었으니…. 이제 가족들은 물론 복돌이도 어깨에 힘을 주고 환한 표정으로 병원에 들어온다. 내가 강아지의 품종을 잘 모른다는 걸 아는 병원 식구들은 나를 ‘사기꾼’처럼 보지만, 어쨌든 복돌이는 ‘수의사’가 인정한 비숑프리제다. 누가 복돌이의 품종을 물으면 가족들은 당당하게 동물병원 원장님이 그러셨다며 비숑프리제라고 얘기하신단다.
갈색 푸들 뽀또는 처음 내원할 때 480그램의 작은 아이였다. 젖니도 안 난 아기를 50일 된 강아지라고 데리고 온 보호자는 50일치고는 너무 작다는 내게 자랑스럽게 “티컵강아지”여서 그렇다고 대답했고, 1년 뒤 지금 뽀또는 7.8킬로그램의 건장한 푸들이 되어 병원을 겅중겅중 뛰어다닌다. 사기당했다며 가끔은 씁쓸한 웃음을 짓긴 하지만 뽀또의 가족은 너무나 건강한 뽀또만으로 행복해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난히 ‘순종’에 집착한다. 혈통서를 따지고 외모로 A급, B급, C급 등으로 분류해서 가격 차이까지 둔다. 더 작고 순수한 혈통의 아이를 원하는 수요에 맞추다 보니, 이처럼 미숙아를 작은 강아지라고 파는 경우도 있고, 흔하지 않은 품종의 경우에는 엄마 아빠가 챔피언이니 혈통을 유지하게 중성화를 시키지 말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
인턴 시절 나는 보호자들이 ‘이 애가 순종이에요? 순종 맞아요?’를 물어보는 게 못내 거슬렸다. 그 질문에 순종 잡종이 무슨 상관이냐고 했지만 지금은 다르다. 순종이냐는 질문에 내 대답은 언제나 ‘예스’다. 가족 눈에 몰티즈면 몰티즈인 것이고, 푸들이면 푸들인 것이다. 내가 던지는 한마디에 아이들의 인생이 바뀔 수도 있다는 걸 겪으면서 깨달았다.
어린 시절 친구네 집에서 얻은 강아지를 데리고 동물병원에 갔던 기억이 있다. 강아지 품종에 대해 몰랐던 우리 가족은 그 개가 오리사냥개라는 얘기를 듣고 수의사에게 물어봤다. 그 선생님의 답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음… 생김새는 레트리버를 닮았는데요, 털이 짧고 크기가 작은 걸 보면 아마도 실내에서 키우도록 개량된 품종 같아요.” 돌이켜보면 우리 집 ‘하니’는 코커스패니얼과 약간 유사한 얼굴을 한, 베이지색 털을 가진 ‘믹스견’(잡종)이었다. 하지만 수의사 선생님의 말 한마디로 하니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레트리버 개량종’으로 우리와 함께 살았다.
세상에는 수백종에 이르는 강아지가 있다. 거기에 맞추다 보면 안 닮은 품종이 없다. 우리가 흔히 아는 품종견들도 여러 대에 걸쳐 개량된 종이다. 어찌 보면 품종을 따지는 것 자체가 우스운 것이다. 그런 우스운 품종 판별에 민감한 사람들에게는 반려견에 대한 마음가짐을 먼저 이야기하기보다는 그 아이가 가진 품종의 유사성을 극대화시켜 이야기하면 된다. 그러다 가족으로 지내면서 서로 정이 쌓여가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아이가 될 테니까. 덕분에 우리 병원에도 세상에 몇 안 되는 희귀 품종이 가끔 등장한다. ‘자이언트’ 미니핀, 잭 러셀 테리어 ‘개량종’. 심지어 요즘은 정말로 새로운 품종을 만들고 있다. ‘부암동 씩씩이’, ‘평창동 몰티즈’, ‘자양동 바둑이’ 종… 이런 식으로 새로운 품종들이 늘어가고 있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품종!
박정윤 수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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