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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1.24 19:49 수정 : 2014.06.13 16:11

[토요판] 박정윤의 P메디컬센터

보스는 10살이 넘은 골든레트리버다. 보스의 할아버지는 일흔이 넘으셨다. 난 처음 보스와 할아버지를 만났을 때를 잊지 못한다. 할아버지가 한 손에 쇠못이 잔뜩 박힌 각목을 들고 자전거에 개를 묶어 병원으로 왔다. 깜짝 놀랐다. 할아버지가 심장사상충 예방을 안 한다는 말에 꼭 해주어야 한다는 말을 했다. 할아버지는 손주가 강아지를 샀다가 군대를 가게 되어 자신이 맡아 기른 지 벌써 10년이 넘었다며, 이젠 힘이 달려 귀찮다고 퉁명스럽게 말씀하셨다. 그 모습을 보며 보스가 바깥에서 ‘어쩔 수 없이 키워지는 개’는 아닐까 싶어서 안쓰러웠고 행여 그 각목으로 보스를 위협하는 건 아닐까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그게 우리의 첫 만남이었다.

보스가 처음에 내원한 이유는 발가락에 있는 혹 때문이었다. 혹이 자꾸 덧나서 걸을 때마다 힘들어한다는 것. 약을 먹여도 낫지 않는다는 어르신 얘기에 나는 발가락 사이 염증이 만성적으로 문제가 되어 재발할 수 있다고 설명해드렸다. 근본적인 치료를 위해 조직검사를 하자고 했다. 할아버지는 다른 병원에서 수술도 해보고 조직검사도 해봤지만 낫지 않았다며 “그놈들처럼 사기 치지 말고 다른 방법으로 치료할 수 있냐”고 막무가내로 요구하셨다. 또 “자장면 사 먹으라고 자식들이 주는 돈을 모아 치료하는 것이니 절대 비싸게 받으면 안 된다”는 무서운 당부의 말씀을 덧붙였다. 3주에 걸친 치료와 설득 끝에 보스는 수술을 받았다. 결국 할아버지가 몇달은 자장면을 못 드실 비용이 나오긴 했지만 수술 경과가 좋아 나는 보스 할아버지에게 작게나마 신임을 얻을 수 있었다.

알고 보니 보스와 할아버지는 10년 동안 산책을 다니는 걸로 동네에서 유명했다. 보스를 키우며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함께 산책했다는 것 외에도 아침과 저녁에 같은 곳을 빙빙 돌면 지루할까봐 8자 코스로 다른 곳을 보여준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또 몇년 전 보스가 동네에서 몰려다니는 진돗개들과 마주쳐 공격당하는데 할아버지가 쫓아내고 지켜주는 게 힘에 부쳐서 미안하셨단다. 호신용으로 보스를 위해 직접 각목을 만든 것이란 사연도 들었다.

그래도 심장사상충 예방만은 거부하는 할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계속 사상충 예방을 입에 달고 사는 나에게 할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처음엔 보스도 마실 나오면 뛰고 나도 뛰었고, 그 뒤엔 나나 보스나 힘이 좋아 자전거를 탔어. 그러다 보스가 자전거를 따라오지 못하더라고. 이제는 둘 다 늙어서 자전거를 지팡이 삼아 같이 걸어 다녀. 난 보스가 나보다는 빨리 죽었으면 좋겠어. 내가 자전거 끌고 다닐 기력이 없고 먼저 가기라도 하면 보스는 어떡해. 그러니까 난 예방 같은 건 안 할 거야.” 난 그날 이후로 더이상 보스 할아버지에게 심장사상충 예방을 권하지 않았다.

즐겁게 재롱을 보실 겸 어른들께 어린 강아지를 사서 드리는 경우가 있다. 사정이 생겨 자녀가 키우던 동물을 부모님이나 시부모님께 위탁하는 경우도 많다. 동물이 주는 행복감이 있지만, 나이 든 분들이 나이 든 동물과 함께 지내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아무 음식이나 주는 것 때문에 자식들과 다툼을 벌이기도 한다. 아기처럼 손이 가다 보니 동물을 씻기는 것도, 귀 청소나 청결 관리, 건강 관리해 주는 것도 버겁다. 나이 들어 병치레하다가 떠나는 동물들에게 감정이입을 하다 시름에 빠지는 어른도 주변에 많다.
박정윤 수의사

어르신과 동물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자. 어르신들이 아이들의 뒷바라지에 버거워 무력감을 느끼지 않도록, 나이 든 동물의 건강과 자신의 건강을 겹쳐서 생각하지 않도록 말이다. 만약 어르신들이 동물을 키우는 방식에 답답함을 느낀다면 반드시 원칙대로는 아니더라도 나름의 타협안을 생각해보자. 보스 할아버지처럼 어르신들 나름대로 우리가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까지도 헤아리고 고민하고 계신지도 모른다. 이해하기 힘든 어떤 행동에도 이유가 있지 않을까.

박정윤 수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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