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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3.02 21:36 수정 : 2014.06.13 16:49

이진순 미국 올드도미니언대 교수

[토요판] 엄마의 콤플렉스

가깝게 지내던 친구 부부가 이혼을 했다. 두 사람 다 번듯한 전문직에 아이들도 잘 자랐고 경제적으로도 안정된 편이라 남들 보기엔 그저 평탄하고 단란한 가정이었다. 이혼의 사유를 따지는 건 엎지른 물에서 제일 먼저 떨어진 물방울을 찾는 것처럼 부질없는 짓이지만, 부인의 말에 따르면 남편의 한마디가 그동안 억눌린 갈등을 폭발시킨 발화점이 된 건 분명하다. “당신이랑 사는 게 피곤해. 당신은 무지 잘난 줄 알지?” 그 말을 옮기며 부인은 설움에 복받쳐 울먹였다. 알고 보니 부인이 줄곧 남편보다 수입이 많았다. 학벌로 따져도 부인의 가방끈이 더 길었다. 유능한 커리어우먼에 알뜰한 살림꾼이었는데, 그게 사달이었다. 남편은, 명문대 대학원까지 나온 돈 잘 버는 마누라 때문에 기가 죽고 늘 치이는 느낌이었다고 했다.

2010년 퓨 리서치센터의 통계를 보면, 미국에서 남편보다 돈을 잘 버는 여성의 비율은 22%로, 1970년 4%에 불과하던 것에 비하면 크게 늘었다. 한국 통계를 이리저리 찾다가 그만두었다. 세무서 기록이라면 모를까, 이런 조사에서 부인이 더 번다고 순순히 응답할 사람이 많을 것 같진 않다. 언젠가부터 ‘알파걸 베타보이’란 말이 새로운 트렌드로 회자됐다. 알파걸이란 자아존중감과 독립심이 강하고 재능과 리더십이 있는 여성을 가리킨다고 사전에도 나오는데 베타보이란 말은 족보가 애매하다. 본래 베타메일(beta male)이란 도전적이고 지배적인 알파메일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위험과 도전을 피하고 알파메일의 카리스마에 순응하는 수컷을 가리키는 동물학 용어다. 알파걸과 베타보이의 조합은 하나의 이데올로기다. 베타보이가 마누라 그늘에 머무는 찌질남으로 재규정되면서 알파걸은 본래 의미를 벗어나 남편 기죽이는 건방진 여성의 대명사가 돼버렸다. 여학생의 대학 진학률이 남학생을 앞서고 의대와 사법연수원에서 성적이 우수한 여성의 비율이 높아지는 것이 불길한 재앙의 징조처럼 보도된다. 신화화된 알파걸의 거세 공포 속에서 여성이 남성 임금의 63%를 받는 현실은 호도된다.

남편보다 더 벌고 잘 배운 죄로 남편을 피곤하게 했다니, 지난 세월이 아깝다며 여자는 울었다. 허울은 좋지만 수입이 변변찮은 남편 직업 때문에 야간근무와 당직을 서야 하는 부서로 옮겨 가계를 충당했고, 남편 기죽일까, 아이한테 소홀할까 밤샘한 다음날엔 기진맥진한 몸으로 평소보다 신경 써서 아침상을 차리고 주말에도 청소와 애 보기를 도맡아 했는데, 그때마다 남편은 소파에서 뒹굴면서 낮잠만 자더라는 것이다. 집안일까지 하면 더 찌질해질까 두렵다는 듯이. 부인이 실질적인 가장인 가정이 적지 않은데, 지난해 한국에서 육아휴직을 쓴 남성은 고작 1400여명, 여성 휴직자의 2.47%에 불과하다. 육아와 가사가 온전히 여성의 몫으로만 치부될 때, 알파걸의 재능은 결혼과 함께 사장되고 직장 내 성차별은 온존된다. 남성을 피곤하게 하고 주눅 들게 하는 건, 피곤에 전 알파걸이 아니라 낡은 성적 역할론을 고수하는 찌질한 사회다.

이진순 미국 올드도미니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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