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04.06 21:04
수정 : 2014.06.13 16:52
[토요판] 엄마의 콤플렉스
미국에 관해 근거 없는 신화가 몇 가지 있다. ‘미국 대학생들은 입학과 동시에 경제적으로 독립을 해서 학비를 벌어가며 공부한다’는 믿음도 그중 하나다. 미국 영화를 너무 많이 봤거나 어설픈 미국 유학생들의 뻥에 속은 것이다. 학자금을 대출받고 파트타임으로 용돈을 버는 학생들도 있지만, 부모가 만들어준 신용카드로 생활하고 전공이며 진로를 부모가 정해주는 대로 별생각 없이 따르는 학생도 적지 않다. 한국에 치맛바람 극성 엄마만 있는 게 아니듯 미국에 자유롭고 방임적인 부모만 있는 것도 아니다.
지난 석달간 내가 지도하는 한 학생의 엄마로부터 거의 스토킹을 당하다시피 했다. 자기 딸이 이번에 졸업을 하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라는 걸 알고 열이 뻗친 모양이었다. 그 학생은 다섯 과목에서 F를 받아 학점 미달이었다. 사정을 모르는 엄마는 이틀에 한번꼴로 내게 장문의 전자우편을 보내고 내 연구실로 수십차례 전화를 걸어왔는데 그때마다 1, 2, 3, 4 번호를 매긴 질문이 청문회 질문지 못지않았다. 유감스럽게도 미국에선 ‘가족의 교육권과 프라이버시에 관한 법률’(FERPA)에 따라 18살 이상이 된 학생의 성적과 학교생활에 대한 일체의 기록은 당사자의 서면동의가 없는 한 부모에게도 공개하지 못하도록 돼 있다. 법적인 조항을 알려주고 성적에 관해 궁금한 게 있으면 딸에게 직접 묻거나 딸의 동의서를 제출하라고 했다. 동의서를 우편이나 팩스로 보내면 학생의 자유의사를 확인할 수 없으니 반드시 학생이 직접 찾아와 제출해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석달이 지나도록 그 학생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사이 학생의 엄마는 동의서를 받았냐는 전자우편을 끊임없이 보내왔고 난 만나지 못했다는 응답을 자동응답 기계처럼 반복해야 했다.
마침내 지난주 그 학생이 내 방에 찾아왔을 때 난 너무 반가워 소리를 지를 뻔했다. 동의서만 후딱 던져놓고 도망가려는 걸, 너 없이는 네 엄마랑 통화하지 않겠다고 간신히 붙잡아 앉혔다. 다음에 어떤 과목을 어떻게 수강할지 하나하나 짚어가며 점검한 다음 그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강 계획에 대해서 개괄적 설명을 한 뒤 구체적인 건 딸이 답하게 했다. 엄마는 딸이 뭐라 하건 아랑곳없이 잔뜩 화가 난 음성으로 내게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딸이 야무지지 못하니 자기가 확실히 확인해 두어야 한다고 했다.
“봤지요? 우리 엄마가 이래요.” 삼자통화가 끝나고 학생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언젠가 이 학생이 내 수업을 들은 적도 있다. 과제물도 제대로 안 내고 출석도 띄엄띄엄, 노는 것도 아니면서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고 앉아 있는지 알 수 없는 유령 같은 아이였다. 엄마의 닦달 덕에 펑크 난 학점을 채울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이 아이가 잃어버린 자기 인생의 오너십은 어떻게 복구할 수 있을지 난 답이 없다. 자기 삶의 오너십을 잃은 엄마들일수록 자식 인생의 주인 행세를 하려 든다. 엄마도 애도, 자기 삶의 이방인일 뿐이다.
이진순 미국 올드도미니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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