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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8.20 18:55 수정 : 2014.08.21 17:43

일러스트레이션 이민혜

[매거진 esc] 성석제의 사이(間) 이야기
급한 마음에 차를 세우고 들어간 주유소 화장실에서 온몸으로 문짝을 붙들 수밖에 없었던 사연

때는 늦가을이었고 단풍이 절정을 이뤘다는 뉴스가 지나간 지 열흘쯤 되어 낙엽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사람 많은 건 싫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건 보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라 나는 혼자 설악산에 다녀오던 참이었다. 숙박업소도 한산했고 관광지 주차장도 거의 비어 있었다. 철 지난 노래를 빌리면 철 지난 바닷가를 홀로 걷는 기분이랄까. 그게 괜찮았다. 조금 더 노래를 따라가자면 ‘달빛은 모래 위에 싱그러운데 아 소리치며 우는 저 파도와 같이 무척이나 당신을 그리워했지’에 어울릴 날씨였다. 누릴 것을 다 누렸으니 이제 돌아갈 시간이었다.

장기에 불순물이 많이 쌓였다, 쓸모를 다한 짐을 바깥으로 배출하라는 신호를 계속 내부에서 보내오고 있었지만 나는 마음에 드는 ‘철 지난 바닷가 같은’ 풍경의 휴게소가 없다는 이유로 나타나는 내면의 요구를 계속 흘려보내고 있었다. 내가 운전하는 차의 연료통에서는 언제부터인가 ‘배출’에 반대되는 ‘투입’을 요구하고 있었다. 연료 단가가 주유소마다 달랐고 마음에 드는 단가가 나오지 않았으므로 그 또한 내가 신체의 절박한 요구를 계속 무시하는 이유가 되었다.

마침내 더 이상은 무도한 주인의 전횡적인 무시를 참지 못하겠다는 신체 최말단기관의 요구, 그리고 최저는 아니지만 차차차최저가는 되겠다는 연료 단가가 맞아떨어져서 나는 차를 끌고 어느 휴게소에 들어갔다. 일단 화장실에서 가장 가까이에 차를 대고 사방을 둘러보니 나 말고는 여행객 차로 보이는 건 하나도 없었다. 주유기 앞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젊은이가 눈이 빠져라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을 뿐으로 사방은 적막했다. 나는 지체 없이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 모두 문이 열려 있는 다섯 개의 칸에서 가까운 칸으로 들어갔다. 공중화장실의 경우, 출입문에서 가장 가까운 칸을 사용하는 확률은 20퍼센트도 되지 않는다는 말을 어디서 들었기 때문이었다.

화장실 내부는 비교적 깨끗했고 휴지도 충분했다. ‘선주민’의 흔적은 시각적, 후각적으로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이웃의 칸에도 사람이 있다는 신호는 없었다. 나는 최대한 느긋하게 앉아서 최근의 일 가운데 가장 기억해둘 만한 것에 대해 떠올리려 했다. 또한 앞으로 가장 기대되는 만남에 대해서도 상상하려고 애썼다. 시간이 남아서 우주가 앞으로 언제까지 더 확장될 것이며 언제 수축을 시작할 것인지 계산했다. 화장실에서 하는 일이 대개 그런 일이니까. 당신들은.... 아닌가?

그런데 갑자기 나의 엄숙한 명상을 깨뜨리며 왁자지껄 떠들어대는 것이 존재의 속성이 된 듯한 사람들이 화장실 안으로 밀어닥쳤다. 그들은 짐작하건대 나이가 40대 중반에서 80대 초반 사이의 여성들이었으며 두 대의 관광버스에 나누어 타고 설악산으로 단풍관광을 다녀오는 사람들이었다.

‘아니 동방예의지국에서 남녀가 유별한 법이거늘, 아무리 화장실이 갑자기 들이닥친 손님 때문에 부족하기로서니 어찌 여자가 남자 화장실에 들어와서 제집인 양 활개를 치며 쓸 수가 있단 말인가?’

그거야 내 마음속의 어떤 고리타분한 캐릭터의 소리이고 실제로 발음은 되지 않았다. 오히려 여자들이 내 얼굴을 보고 자신들의 몰염치한 행동에 대해 부끄러워할 것이 걱정되기도 했다.

고속도로 휴게소를 비롯한 공공장소의 화장실은 칸수로 보면 남녀가 비슷한데 남성은 대소변 변기가 구분되어 있고 시간적으로 여성이 남성보다 더 오래 사용한다는 점에서 보면 비민주적이거나 불평등하다는 논리가 설득력을 얻은 지는 오래되었다. 새로 생긴 화장실들은 그런 점에 유의해서 여성 화장실의 칸수를 더 늘리는 방향으로 설계되고 있다. 그런데 내가 있던 휴게소하고도 화장실은 지은 지 20년은 된 곳으로 그런 배려는 눈곱만큼도 하지 않고 있었다. 아무튼 사람 없는 휴게소의 사람 없는 남자 화장실에 들어왔다가 갑자기 많은 여성 사용자를 만나고 그들 때문에 화장실에 관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된 상황이었다.

“아까부터 이 앞칸에 들어앉아 있는 문디 가시나는 누고? 누길래 아까부터 이래 안 나오고 안에서 끽소리도 안 내고 앉아만 있나? 혹시 담배 피우는 거 아이가? 공공장소에서 담배 피우마 벌금이 얼만지 아나?”

거센 경상도 사투리로 나를 질타하며 심지어 발로 문을 걷어차는 여자가 나타났다. 나는 화가 났지만 그렇다고 문을 열고 맞서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 적어도 십 대 일은 될 상황에서 상대는 사정이 급하고 나는 볼일을 다 보았으니 전의에서 상대가 되지 않았다.

“야야, 담배 다 피았으마 좀 나와라카이! 여 기다리는 사람이 및인데, 니는 미안토 안 하나? 신고해서 벌금 안 물리꾸마 후딱 나오기나 해라.”

어떤 여자는 아예 나를 공중화장실에서 담배나 피우는 파렴치한 인간으로 몰아붙이고 있었다. 정말 홧김에 나가버릴 뻔했다.

“언니야, 일로 와라. 여기 자리 빘다. 그 칸은 아까부터 암 소리도 안 나는 기 문이 고장난 거 겉다.”

다행히 어떤 자비로운 여성이 나를 구원했다. 나는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옆칸, 아니 화장실 전체적으로 특정한 향기를 품은 기체, 액상물질, 고형물질을 신체 밖으로 배출하는 인간들의 생리현상에 수반되는 여러 가지 음향이 그치지 않고 나고 있었고 물 내리는 소리, 물이 다시 고이는 소리 등으로 내 한숨 소리는 들리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 공무원 자슥들은 세금 받아가 다 어데다 쓰길래 여자 변소를 이래 좁아터지기 만들고 기다리다가 오줌 다 싸게 만드는가 모르겠다.”

“그랜께 이럴 때는 옆에 남자 변소 같은 데라도 개방해서 쓰기 해줘야 한다 칸께네. 아까도 보이 버스 기사 혼자 들어가서 일분도 안 걸리가 나오더라. 지금도 저쪽은 텅텅 비아 있다.”

내 머리가 하얘졌다. 머리카락이 아니라 내부가, 과도한 조명이 비친 무대처럼.

“강간버스는 언제 간다 카더노?”

“아직 한 오분은 남았어예.”

“한 칸은 고장까지 난 변소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다 쓸 수나 있을랑가 모르겄다.” “암만 급해도 똥 누는 사람 놔두고 가기야 할라꼬.”

“나는 일주일째 변비라카이. 클났어.”

여자들이 단 한 사람이라도 남아 있는 한 나는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허벅지가 저려왔고 쥐가 내렸지만 나는 비명조차 내지 못했다.

“이 칸은 끝까지 속 씩인다.”

마지막 여자가 내가 들어 있는 칸의 문을 부서져라 걷어차는 바람에 문짝이 떨어져나가는 줄 알았다. 나는 온몸으로 문짝을 붙들고 버텼다.

화장실에 들어가고 나서 이십여 분이 흐른 뒤 밖으로 나와 보니 주차장에 서 있는 버스로 단풍에 질세라 알록달록하게 옷을 차려입은 손님들이 올라가고 있는 게 보였다. 그들은 손에 뜨거운 음식이 든 종이컵이며 상대적으로 싸고 맛있어 보이는 지역 특산 과일을 사들고 있었다. 멍청하게 서 있는 내 머리 위에 있는 화장실 표시에는 치마를 입은 사람 모양이 표시되어 있었지만 누구도 그에 대해 신경을 쓰는 것 같지 않았다.

나는 버스에 가까이 갔다. 거의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들은 어두워오기 시작한 늦은 가을날의 황홀한 저녁놀, 부드러운 바람에 대해 조용조용 담소를 나누고 있을 뿐이었다.

성석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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