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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이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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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성석제의 사이(間) 이야기
윈난성의 산해진미 숲 끝에서 찾아나선 위장약 구하기 여정과 ‘귤화위지’의 교훈
중국하고도 윈난성에서 7박8일간의 여행 일정이 거의 끝나고 귀국할 비행기를 타는 일만 남았을 때 나는 쓰라린 배를 부여잡고 쿤밍의 어느 대형 약국 문전에 서 있었다.
중국 음식은 다양하기도 하지만 진화가 빨랐다. 특히 오래 머물렀던 리장은 윈난성의 관광 거점도시다 보니 중국 전역에서 몰려오는 관광객들의 입맛은 물론 외국인들도 좋아할 음식이 천지였다.
중국 현지의 여행사를 통해 예약을 하면서 일인당 한 끼 식사 비용으로 40위안(당시 위안화 환율은 170원쯤이었다)을 책정했는데 매끼 열 명이 둘러앉는 원탁에 오르는 요리의 가짓수가 엄청났다. 네댓 접시까지는 맛있게 먹고 이제 밥이나 반찬이 나오고 끝이겠거니 했지만 그다음, 다음의 요리가 더 입맛을 당기게 하면서 열 가지 넘게 나왔다.
“난 어떤 나라, 어떤 지방에 가서는 그 지역 고유 음식을 꼭 먹어야 해요. 안 그러면 거길 간 것 같지 않아요. 그게 그 지역의 본질이고 역사고 인간이고 문화죠. 어릴 때부터 우리 한식만 좋아하고 편식을 심하게 했더니 남의 나라, 남의 땅에 가면 그곳 음식만 먹어야 한다는 벌을 받는지도 모르겠어요. 어쩌겠어요. 맛있는 벌인데.”
여행 초반에 일행들에게 자랑을 한 죄로 식탁에 함께 앉은 사람들의 시선을 자주 받게 된 탓에 나는 먹고 또 먹어야 했다. 여행 기간에 적어도 5만 칼로리 이상을 섭취한 것 같았다. 내가 평소에 먹던 것에 비해 압도적으로 고기 종류가 많은데다 기름졌다. 조금 과장되게 말한다면 나는 최선을 다해 분투했다. 세계에서 가장 긴 역사와 다양성, 많은 인구를 가지고 있는 음식문화를 상대로 스무 끼가 넘는 전장에서.
중국음식은 양념과 조미료가 많이 들어간다. 소스는 진하고 짜다. 윈난성에는 바로 붙어 있는 쓰촨성의 요리문화를 칭하는 천채(川菜)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그런지 매운 것도 꽤 있었다. 남쪽의 아열대기후에서 해발 2천미터가 훌쩍 넘는 고산지대에 이르기까지 곡식, 채소, 산채, 버섯, 가축, 민물고기, 야생동물 등 갖가지 음식재료가 생산되고 송이 같은 고급 재료가 아주 싸고 많다. 쉽게 말해 자극적이면서도 자꾸 먹게 만들었다. 소화기관이 과로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장 큰 타격을 입힌 것은 술이었다. 바이주(白酒)라고 불리는 중국 고유의 증류주는 대부분 알코올 도수가 40도를 넘었다. 중국의 술은 가짜가 많기로 유명한데 가짜 바이주는 포름산이나 포름알데히드처럼 인체에 치명적인 독성을 지닌 물질로 변할 수 있는 메틸알코올을 많이 함유하고 있어 잘못 마셨다가는 실명하거나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 가짜임을 감추기 위해 값도 진짜처럼 비싸게 받으므로 가짜를 먹었다는 것을 나중에 깨닫게 될 경우에 나 같은 사람은 복장이 터져 죽을 위험성 또한 높다. 나는 중국에 갈 때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 ‘수××’이나 ‘○○타이’처럼 유명한 술보다는 그 지방에서 가장 많이 팔리면서 싼 술을 찾아서 사마시곤 했다. 그러면서도 “진정한 술꾼이라면 어떤 나라 어떤 지방에 가면 지역에서 생산되는 술을 꼭 마셔야 해. 안 그러면 거기에 간 것이라고 할 수도 없지. 술을 마실 자격이 없는 거야” 하고 큰소리를 쳐댔다. 그 말에도 책임을 져야 했으므로 생소한 이름의 지역 바이주가 하루 두 끼는 빠지지 않고 밥상에 올랐다.
높은 도수의 알코올은 소화기관의 약한 점막을 자극해 출혈을 일으키기 쉽다. 염증이 있는 경우는 금방 악화된다. 증류주는 마시면 빨리 취하지만 깨기도 쉽게 깬다는 말들을 많이 하는데 맞든 그르든 그건 취기의 문제고 소화기관은 회복에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그나마 쉴 시간도 주지 않고 마셔대니 탈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내 뱃속에서 일어나고 있던 증세는 윈난성의 소수민족 숫자처럼 다양했다. 가스가 자주 발생해 배가 꾸르륵거리고 배가 빵빵하게 부풀었다. 시도 때도 없이 살살 아프다가 아랫배까지 모두 찌르르 얼음에 금 가듯이 아파왔다. 헛구역질이 솟아올랐으며 명치가 막힌 듯 체기가 있는 중에 느닷없이 신트림이 나고 식도를 통해 나쁜 냄새가 올라오는 것 같기도 했다. 근본적으로 뭘 먹어도 소화가 잘 되지 않았고 배가 고파도 입맛이 없었다.
약이 든 종이갑을 집어들었다
약에 대한 설명은 별다를 게 없었다
계속 따라 읽어가다 보니
맨 아래 영어 상표가 보였다
한국서도 유명한 수입산 위장약이었다
나는 약국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한국 사람, 일본 사람이 많이 찾는지 보약이나 정력제 코너에는 일본어와 한글로 된 안내판이 붙어 있었다. 소화가 되어야 몸이 좋아지든 정력을 발휘하든 할 게 아닌가. 나는 위장약을 찾아달라고 하기 위해 계산대에 있는 평상복 차림의 종업원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종업원은 물론 흰 가운을 입은 약사까지 중국어와 한자 말고는 외국어를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내가 무슨 구경거리나 되는지 자기들끼리 마주 보며 웃기만 할 뿐이었다. 이게 웃을 일인가.
할 수 없이 손에 들고 있던 스마트폰의 메모 창에 전자펜으로 위(胃)와 약(藥)이라는 글자를 써 보였다. 하지만 그들은 중국 바깥에서 쓰는 한자의 번체(繁體)도 몰랐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약’(藥)은 그들이 쓰는 간체(簡體)로 ‘葯’이었다.
결국 나는 배를 싸쥐고 허리를 굽힌 채 앓는 소리를 내고 트림을 하는 등 여러 가지 모습을 연기해 보여야 했다. 내장의 불수의근을 설득해서 가스를 배출하게 하려면 어떻게 하나 고민하는데 젊은 종업원이 웃음을 터뜨리며 반응했다. 나는 그녀가 안내하는 대로 위장약을 모아놓은 곳으로 갔다.
그런데 약의 종류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간체로 쓰인 약상자의 안내문을 대충 읽어보았다. 대부분이 서로 베끼기라도 한 듯 비슷한 내용이었다.
‘본 제품은 위를 편하게 하고 장을 깨끗하게 해주며 특유한 냄새가 있습니다. 맛이 약간 맵고 쓰며 진통작용을 수반하고 시원한 느낌을 줍니다. 위를 따뜻하고 편안하게 하고 건강하게 하며 통증을 멈추고 기(氣)를 다스립니다. 명치가 막힌 것을 뚫어주고 불쾌한 증상을 치료하며 위산과다, 구토, 속쓰림, 위통, 복통, 위의 팽만감, 설사 등등에 특효가 있습니다.’
그렇게 많은 만병통치약 중에서 어느 게 좋은 건지 알 수가 없어서 나는 손가락으로 약을 하나하나 가리키며 엄지를 추켜올려 보았다. 그때마다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혹은 흔들기도 하던 그녀는 어느 것 하나를 가리키자 갑자기 마주 엄지를 치켜들었다. 나는 맞는지 틀리는지 누구도 모를 중국어로 물었다.
“쩌거 쯔이하오마(이게 가장 좋은 것인가요)?”
그녀는 고개를 힘차게 끄덕거렸다. 나는 그 약이 든 종이갑을 집어들었다. 한자로 빼곡하게 적혀 있는 약에 대한 설명은 다른 것과 별로 다를 게 없었다. 그런데 계속 따라 읽어가다 보니 맨 아래쪽에 영어로 된 상표가 보이는 게 아닌가. 그것은 한국에서도 유명한 수입산 위장약 ‘Tal◎◎’였다. 다국적 제약사인 ‘BAY◇◇’에서 생산하는.
‘(강남의) 귤이 회수(淮水)를 건너면 (강북의) 탱자가 된다’(橘化爲枳)는 중국의 고사는 중국의 문자가 여러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고 때로 과장이 심한 한자여서 나올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사족. 귤은 영어로 ‘mandarine’이라고 한다 한다. 사족의 사족. 원래 귤의 고향은 회수 이남이 아니고 인도의 아삼 지방이라고.
성석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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