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4.11.05 20:24 수정 : 2014.11.06 10:00

일러스트레이션 이민혜

[매거진 esc] 성석제의 사이(間) 이야기
접시에 뼈가 수북해질 때까지 생선살을 발라주던 부인, 남이 발라주는 생선살의 꿀맛

글을 쓴다는, 남들이 ‘창조적인’ 직업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창작을 함에 있어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술? 노름? 잡기? 낮잠? 색성향미촉법? 나는 ‘살림’이라고 생각한다. 살림은 창작의 대적이고 ‘죽임’이다.

가사의 신성함이라든지 주부의 희생정신을 모독하자는 게 아니다. 살림의 무서움을 실감하는 것은 밖에 나와서 원고를 쓸 때이다. 수렵, 어로를 전담하던 남정네의 호르몬이 유독 내게 많아서인지 집에서는 도무지 생업에 관련된 일을 할 수 없다. 원고가 있으면 노트북 컴퓨터와 생활용 짐이 든 배낭을 짊어지고 밖으로 나가야 한다. 거처를 잡고 청소를 하고 정리를 해서 사냥터, 낚시터를 만들어간다. 그런데 난데없이 꼬르륵하고 배가 고파온다.

나는 배고픔과는 그다지 잘 사귀지 못했다. 낯설다. 조상과 조부모와 부모를 잘 만난 덕이다. 밥을 굶어본 적이 없다. 거의 굶을 뻔한 적은 한 번 있었다. 쌀이 떨어져서가 아니었다. 광에 쌓여 있는 나락을 읍내 방앗간에서 찧어다가 밥을 지어먹곤 했는데 머슴이 무슨 일로 게을러서 쌀을 찧어 오는 일을 등한시한 것이다. 오후에야 쌀이 떨어진 것을 알게 된 식구들이 머슴을 채근해 소가 끄는 수레에 나락을 실어 보냈으나 어두워지도록 머슴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야기가 자꾸 커지는데 수레를 끌고 간 소는 당시 일대 몇 개 군의 장에서 기록을 세울 정도로 비싸고 크고 양순하고 한 번에 새끼를 두 마리씩 낳는 어마어마한 동산(動産)이었다.

오막살이집 한 채 값이 나가는 소가 돌아오지 않는 것에 대해 식구들은 아무도 걱정하지 않았다. 이대로 허무하게 한 끼를 굶고 넘어가야 하는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나는 난생처음 한 끼를 굶게 되었고 평온하기 그지없던 내 인생에 큰 기록으로 남길 수 있다는 생각에 살짝 흥분해 있었다. 머슴은 별이 총총한 한밤중에 배고픈 소를 끌고 배고픈 채 집으로 돌아왔다. 우리 식구들은 배고픈 채로 참고 견디지는 않았다. 집에 있던 보리를 삶아서 먹었다. 예전에 힘들던 시절, 물에 만 보리밥에 풋고추와 막장만 있으면 밥 한 그릇이 뚝딱 넘어갔다는 식의 회고담을 들은 것 같기도 하다. 보리밥도 밥이니 밥을 먹긴 먹었고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 끼 굶어볼 기회를 잃었다. 각설하고, 꼬르륵하고 배가 고파오면 창작인은 어떤 자세로 대응할 것인가.

딴 사람은 모르겠지만 나는 무조건 밥을 짓고 본다. 굶어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한 끼를 그냥 넘겼을 때 내게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지 알 수가 없지만 소설을 쓰는 데 긍정적인 영향을 줄 리는 없다. 핑계 김에 마감을 넘기고 제때 밥을 찾아 먹은 날의 나를 달달 볶을 것이다.

밥이 익는 동안 간단한 반찬을 준비한다. 국이든 찌개든 카레든 짜장이든 뭐든 한 끼를 넘길 수 있을 만한 것이라면 다 좋다. 밥이 익으면 그릇에 푸고 반찬과 함께 혼자 먹기 시작한다. 먹는다. 먹고 싶은 만큼 실컷, 다시는 배고픔 따위로 잡념이 생기지 않도록. 그러고 나면 물론 배가 부르다. 소화를 시킬 겸 해서 설거지를 한다. 깨끗이 치우고 앉는다. 앉아서 뭘 써보려고 한다. 그런데 그때부터 일이 안 된다.

미친 듯이 자전거를 탄다. 기진맥진 산을 타면서 뭘 쓰려고 했는지, 그때의 기분과 에너지를 떠올려본다. 하지만 배부른 뒤로 내 영혼과 육체는 일을 하려 하지 않는다. 이러면 그날 그 일은 망하는 것이다.

여성 중 나이가 가장 많은 분이
생선조림이 든 냄비 앞에서
뼈를 발라 접시에 쌓기 시작했다
신석기 시대의 조개무덤과
골각기가 생각난 건 왜였을까

강원도 속초에는 ‘속초 오대 진미’가 있다. 인터넷에 나오는 ‘속초 5미’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속초 오대 진미’는 내가 정한 것이니 인터넷에는 나오지 않는다. 그렇게 마음대로 막 지어도 되느냐고? 된다. 각자 다 지을 수 있다. 상주 삼미, 대구 오미, 광주 칠미…. 속초 오대 진미는 때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지난여름부터 어떤 선연(善緣)으로 속초를 부쩍 자주 드나들게 되면서 내 나름으로 먹어보고 명성을 듣고 만든 속초의 오대 진미는, ‘원조 할머니 순두부’ ‘홍게 장칼국수’ ‘막국수’ ‘산채정식’(이건 속초에 없고 양양에 있지만 주인이 속초 출신이다) 그리고 ‘생선조림’이다.

생선조림은 속초 같은 항구도시가 아니면 쉽게 먹기 힘든 음식이다. 어항에 들어오는 물고기 중에 크기가 작고 가짓수는 많은 잡어들이 있다. 지명도나 상품성이 떨어져 값이 싸다. 그 잡어를 가져다가 일일이 손질을 하고 양념한 냄비에 넣고 조린 음식이 생선조림이다.

속초에 자주 드나들기 시작할 무렵 속초의 정치 문화 사회 경제를 주름잡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여성들의 점심 초대를 받았다. 황감하게 식당에 달려가 보니 여섯 분의 여성이 이미 좌정해 있었다. 내가 나이가 제일 어린 축이었다. 여성 가운데 가장 연소한 분과도 예닐곱 살 가까이 차이 났다. 여성 중 나이가 가장 많은 분이 생선조림이 든 냄비 앞에 나를 앉혀놓고 생선의 뼈를 발라서 접시에 쌓기 시작했다. 내게는 살을 먹기만 하라는 것이었다.

사양하거나 거부할 수 없는 요청이었다. 모두들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따라서 앞으로 어떻게 대접을 해줄지 결정할 분위기였다. 나는 난생처음 먹어보는 생선의 살을 입에 넣었다. 오, 짭짤하고 맛있었다. 뼈를 바르던 여성이 이름을 말해줬으나 낯설었다. 다음도 그다음도 마찬가지였다. 접시에는 뼈가 수북하게 쌓이고 마침내 자그마한 무덤 형상이 되었다. 신석기시대의 조개무덤과 골각기(骨角器)가 생각난 건 왜였을까. 그날 나는 난생처음 먹는 물고기로만 10여 종이나 밥과 함께 먹었다. 다 먹고 나서는 배가 부르지도 고프지도 않고 딱 알맞았다. 맛은 일단 질감이 다양하고 고소하고 완성도가 높다고나 할까, 총체적으로는 숟가락질을 멈출 수 없도록 기막히게 좋았다. 예의를 차리느라고 중간에 한 번 물어보기는 했다.

“어째서 뼈만 발라주시고 생선은 안 드시나요? 혼자만 먹기가 면구스럽습니다.”

계속 뼈를 바르던 아름다운 부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난 어릴 때부터 내가 먹으려고 생선 뼈를 발라본 적이 없어요. 또 이런 작은 물고기는 뼈 바르기가 성가셔서 못 먹어요. 다른 사람이 맛있게 먹도록 발라줄 수는 있지만 나를 위해 내가 뼈를 발라 먹지는 못하겠어요.”

그러자 식사에는 조금밖에 손을 대지 않고 내내 우리를 지켜보던 옆자리의 여성이 말했다.

“나도 손자들이 게를 먹을 때 살을 빼주기는 하는데 내가 먹을라치면 귀찮아서 못 먹겠어. 안 먹고 말지.”

다른 여성들도 모두 한마디씩 보탰다.

“나도 나 먹으려고 음식을 하면 맛없어 못 먹겠어. 혼자 해서 혼자 어떻게 먹는대?” “아랫목에 앉아서 얻어만 먹으려는 인간도 문제지만 그런 인간이라도 있어야 밥할 맛이 나니, 원.”

수렵과 어로 같은 ‘바깥일’을 한다는 핑계로 매양 얻어만 먹는 족속에게 희망이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숭고한 여성들의 헌신성이 대대로 유전되어 오고 있기 때문이리라. 점점 상업화되거나 줄어들고 있긴 하지만.

성석제 소설가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esc : 성석제의 사이(間) 이야기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