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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이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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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성석제의 사이(間) 이야기
내기바둑 200전200패의 OK 형, 학림다방과 뒷골목 막걸리집을 전전하며 그와 함께 다닌 길들은 남아있는데…
대학에 입학해 1학년 1학기 동안 전국 대학 신입생 미팅 신기록을 깨뜨리겠다는 각오로 오십여 회의 미팅에 나섰으나 결과는 깎아 먹을 수도 없는 ‘무’(無), 허망한 기분으로 2학기를 맞은 참이었다. 더는 미팅 비용을 빌릴 염치도 없었고 알 것 다 알아버린 여학생들 앞에서 감언이설을 늘어놓아 봐야 헛일이라는 게 내게도 자명했다.
‘오! 육체는 슬퍼라, 그리고 나는 모든 책을 다 읽었노라 떠나버리자, 저 멀리 떠나버리자!’는 스테판 말라르메의 시 <바다의 미풍>처럼 상심한 청춘은 그저 학교에서 집으로 낙도 없이 왔다 갔다 하는 나날을 반복했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서클룸(동아리방)에서 OK형을 만났다.
그는 학번이 나보다 둘이나 빨랐지만 학년은 비슷했다. 한 번은 낙제, 한 번은 휴학을 했다던가. 늘 불그레한 얼굴에 며칠에 한 번 세수를 하는지 마는지 호랑이처럼 뻗친 수염을 하고 눈에는 등잔 같은 불을 켠 듯했다.
그는 같은 학번의 문학회 회장과 바둑을 두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 문학회 회장의 바둑은 계산이 빠르고 감각이 좋은 데 비해 그는 장고파에 쓸데없이 전투를 일삼았다. 그 바둑이 끝나고 난 뒤에 그는 마치 프로기사처럼 진지하게 자신의 패인에 대해서는 짧게, 그 판 자체의 성격에 대해서는 길게, 이긴 상대의 경솔함에 대해서는 더 오래 평가했다. 마치 바둑을 이해하기 위해 바둑을 두는 철학자 같았다.
철학과에 다니고 있던 상대가 수업이 있다고 가버린 뒤 그가 내게 바둑을 둘 줄 아느냐, 몇 급이냐고 묻길래 1급이라고 대답했다.
“기원 1급이란 말이가? 그럼 나하고 비슷하네.”
나는 기원 1급에도 하늘과 땅 차이가 있다는 말을 하려다 말았다. 어쨌든 그는 서로 호적수를 만났으니 대국을 하자고 했다.
“뭘 거는데요?”
“거는 기 뭐꼬?”
“바둑을 두면 승패가 있고 승패에 따라서 거래가 생겨나죠. 현금이 보통이고 담배, 버스회수권, 집문서, 아니면 알밤 때리기라도. 집 차이에 비례하는 것도 있고 한판당 얼마로 하는 것도 있어요.”
“뭔 말인지 모르겠다. 바둑을 뜨면 뜨지 돈이 왜 왔다 갔다 하노 말이다.”
바둑을 ‘둔다’고 하느냐, ‘놓는다’, ‘뜬다’고 하느냐에 따라 실력 차이가 확실히 난다.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저는 내기가 아니면 바둑을 두지 않아서요.”
“내 핑생 뭘로도 내기를 해본 적이 없다. 가는 건 니 자유다만 내 철권이 버르장머리 없는 후배를 기양 보낼지 모린다.”
“그럼 이렇게 하죠. 오늘은 바둑 한판 두면서 내기를 할 건지 말 건지를 정하죠. 제가 이기면 내기를 하고, 지면 앞으로 내기를 안 하기로.”
그렇게 바둑을 두기 시작한 이후 우리는 2년쯤 뒤 군대에 가기까지 최소한 200판의 바둑을 두었을 것이다. 결과는 거의 전승이었다. 나는 그의 집에서 값나가는 건 웬만큼 다 땄다. 마할리아 잭슨이나 해리 벨라폰테, 유시 비올링의 음반 같은 것. 생계에 관련된 건 건드리지 않았다.
그는 지고 또 지면서도 치수를 바꾸려고 하지 않았다. 바둑 두면서 큰 소리로 노래를 따라 부르는 것, 바둑이 끝나고 나면 되지 않은 논평을 하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군대에 가기 직전, 마지막 대국에서 기념으로 한판을 져줘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물어봤다.
“형, 바둑 지고 내기 지면 화가 안 나?”
“나지. 화를 일으키는 것도 공부요 화를 가라앉히는 거도 다 공분 기라.”
“뭔 공부? 그 공부는 몇 학점짜린데? 형, 요번 학기 낙제 안 하는 거 맞아? 이번에 낙제하면 완전히 제적 같은데?”
“그까이 학점에 연연하지 않는 것, 낙제가 다 공부 아이냐. 천지만물 삼라만상이 다 공부이니라.”
“그럼 내가 이때까지 형 공부에 이용당한 거네. 지금까지 나한테 바둑 지고 나서 외상한 거 언제 갚을 거야?”
“한판의 바둑이 끝나면 다시는 되돌릴 수 없듯이 지나간 외상을 받으려 하는 것도 부질없는 짓이라는 걸 왜 모르느뇨. 요놈아, 이번 판은 네가 확실히 졌다. 천하의 조남철이 와도.”
창경궁, 창덕궁 돌담길 따라
떨어진 낙엽을 발로 차올리던 게
OK형의 공부였던가
나는 뒤따라가며
“무송의 원앙퇴!”를 외쳤다
진짜 공부는 그런 것 같았다
한 사람에게라도 하루치 용돈이 있다는 걸 확인하면 우리 둘은 나란히 버스를 타고 동숭동에 있는 학림다방으로 갔다. 오전 열한 시쯤에 학림에 도착해서 보면 매일 출근하다시피 해서 소설을 쓰고 있는 이름 모를 소설가밖에 없었다. 삐걱대는 계단 위 어둑한 실내, 낮은 탁자와 낡은 소파, 공기에 밴 커피와 담배와 시간의 냄새, 여름에도 넓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난로가 경외스럽고도 편했다.
플레이어에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이 든 음반을 얹고(나는 바그너의 <탄호이저> 서곡, 그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교향시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Also Sprach Zarathustra)를 첫 번째로 듣곤 했다) 음악이 시작되기 전 앰프 옆에 세워진 칠판에 곡목, 작곡가, 작품 번호 등을 적었다. 손을 떨지 않고 연속해서 쓰되 마지막 마침표를 딱, 소리나게 찍는 것도 숙달된 사람이나 할 수 있었다.
점심을 굶은 채 커피잔에 뜨거운 물을 몇번이고 받아다 각설탕을 녹여 먹으며 기다리고 또 기다리다 보면 여학생들이 하나씩 둘씩 학림에 나타났다. 미팅할 때는 초창기 몇 번 말고는 볼 수 없던, 아름답고 지성적이고 클래식 음악을 애호하고 예술을 사랑하는 여학생들이었다. 우리, 아니 내가 학림에 간 건 바로 그 여학생들 때문이었다. 여학생들은 니체처럼 수염을 기르고 닐 다이아몬드처럼 서글서글한 눈매에 늘 산더미 같은 원고와 잉크통을 앞에 두고 굵은 만년필로 소설을 쓰고 또 쓰고 있는 소설가를 보러 온 것이고. 언감생심 그를 질투할 수는 없었다. 무궁토록 그대로 있어주기를 바랬다. 그런 장소, 시간을 제공하는 학림다방 또한 영원하기를.
견딜 수 없이 배가 고파지면 밖으로 나왔다. 학림다방 뒤편 골목에는 나이 든 여자가 운영하는 식당이 있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남아 있는 모든 돈을 털어서 각각 라면 그릇 하나와 물렁거리는 비닐통 속에 든 막걸리를 받았다. 먼저 막걸리를 그릇 가득 따라서 마시고 있다 보면 라면이 나왔다. 라면을 다 먹고 막걸리를 한 방울 남김없이 마시고 나면 배가 터지듯 불러왔다.
버스 탈 돈이 없는데다 배를 꺼뜨릴 겸 걸어서 오전에 출발한 지점, 그러니까 두 사람이 재학 중인 대학까지 걸어갔다. 창경궁, 창덕궁 돌담길을 따라가다 보면 낙엽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날렵하고 군더더기 없는 몸을 허공에 던지며 낙엽을 발로 차올리던 게 OK형의 공부였던가, 쿵후였던가. 나는 뒤를 따라가며 “무송의 원앙퇴!”라고 외치곤 했다. 진짜 공부는 그런 것 같았다.
고맙게도 학림다방은 아직 남아 있다. 고맙게도 그 시절에 대한 기억, 길의 일부도 그대로 남아 있다. 일년에 한두 번이긴 하지만 막걸리와 라면을 앞에 놓고 앉을 수 있다. OK형은 지금 없다. 플라스틱 그릇으로 된 한 잔의 술, 안주인 라면 한 그릇을 마주 들어 올릴 사람은 더 높은 차원으로 존재를 옮겨갔다. 그리움은 남았다. 그러니 다시 그들의 다사로운 은혜를 찾아 떠나지 않을 수 있으랴. 오, 육체는 슬퍼라….
성석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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