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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12.24 19:02 수정 : 2014.12.25 09:39

일러스트레이션 이민혜

[매거진 esc] 성석제의 사이(間) 이야기
화려한 외모의 신인 여성시인에게 퍼붓던 문단의 욕쟁이 시인, 그 사이에 낀 향토예비군 시인

30대 초반, 그러니까 직장에서 예비군 훈련을 받을 때의 일이었다.

그때 나는 시를 쓰고 있었다. 시에 대한 열정과 사모하는 마음이 하늘에 닿아 시신(詩神)의 답신을 받을 만큼은 아니었으나 머릿속에서는 자나 깨나 시의 물레방아가 쿵덕쿵덕 돌아가고 있던 터라 비슷한 또래, 비슷하게 허기진 눈빛을 한 시인들과 이따금 만나고 있었다.

오후 6시 정시 퇴근 뒤 직장 예비군 훈련까지 네 시간이 비어 있었다. 둔중한 군홧발로 걸어가도 십여 분이면 닿는 인사동에 있는 어느 식당에 몇몇 시인이 모였다. 누구에게나 평생 한 번뿐인 첫 시집 출간을 축하하기 위한 조촐한 자리였다. 언어의 수도사 같은 시인들끼리의 정결하고 조용한 자리가 파하고 나서 예비군에게 조금 더 어울리는 편한 자리를 찾아 이동했다. 비슷한 또래의 문인들-시인, 소설가, 평론가, 출판사 편집자, 교사, 교수, 기자, 직장인 등과 그중 한두 가지 직업을 겸한 사람들이 자주 모이는 술집으로 갔다. 거기서 난생처음으로 돌발적인 언동과 욕설로 유명한 C를 보았다.

그런데 그날 그곳에서도 어떤 사람이 첫 시집을 낸 걸 축하하는 자리가 있었는데 자리가 파하기 직전 다른 사람들과 휩쓸리게 된 모양이었다. 그 어떤 사람은 여자였고 이름도 얼굴도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녀의 시집이 어떤 유명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는데 추천을 해준 유명한 시인은 그 자리에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외로워 보였다. 값비싼 옷차림이었고 미용실에라도 다녀온 듯 외모가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평소에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페넬로페처럼 갖은 찬사를 다 받아가며 추종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을 인상이었으나 그 자리에는 그럴 사람이 단 하나도 없었다. 대부분이 문학과 관련이 있는 사람이고 그들은 마음에 없는 말을 하는 데는 자린고비처럼 인색했다.

몇 다리 건너서 내게까지 전해져온 정보에 의하면 그녀는 무슨 문화센터인가에서 유명 시인에게서 시를 배웠고 유명 시인과 친한 출판사 사장을 소개받아 시집을 출간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렇게 되는 데는 그녀의 남편이 가진 사회적 지위가 결정적으로 작용했다는 것이었다. 그게 뭔지는 몰라도. 쉽게 말해 ‘작품보다는 연줄 덕에 시집을 출간한 여자’였다.

그런데 좌중에 있는 시인 가운데 그 출판사에서 시집을 출간한 사람이 몇 있었고 시에 목숨을 걸겠다던 사람도 더러 있었다. 그들이 그녀를 자신들과 같은 시인이라고 여기지 않는 건 분명했다. 그녀의 정면에 앉아 있던 C는 마치 그들을 대변하듯 그녀에게 야유와 비난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건 곧 자신의 주특기인 욕설로 변했다.

그의 고막은 세포막처럼 반투막(半透膜)이어서 남의 욕은 전혀 들리지 않는 듯했다. 그가 욕을 하는 이유, 곧 짧고 단순한 문장으로 단단히 뭉쳐진 ‘욕 세포’의 핵은 주변에 자유전자처럼 갖가지 욕의 음소와 의미소를 거느리고 회전운동을 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욕은 주변을 안개상자처럼 과포화상태로 만들었고 욕의 전하가 생긴 단어들 때문에 문학이나 시에 관한 어떤 진지한 논쟁도 무의미하게 변했다. 그래서 나중에 온 사람들은 C가 왜 그녀에게 욕을 하는지 영문조차 몰랐다.

이십여분간 곤욕을 당하던
그녀는 마침내 일어섰다
문간에서 날카로운
여자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이 개 같은 놈아!”

좁은 자리에 사람들이 빽빽하게 모여 앉아 있어서 그녀는 쉽게 곤경에서 빠져나갈 수 없었다. 그렇다고 C에게 맞서거나 외면을 할 형편도 되지 않았다. 그녀는 로프에 등을 기댄 채 수비를 포기한 권투선수처럼 일방적으로 공격을 당하고 있었다.

처음 얼마 동안에는 나 역시 그녀가 불공정한 방식으로 시집을 출간한 대가를 치르고 있나 보다 했다. 하지만 계속되는 C의 욕설과 가녀리고 무방비한 그녀의 모습에 예비군, 아니 삼십대 사내의 마음속에서 무엇인가가 쿵덕쿵덕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십여 분간 곤욕을 당하던 그녀는 마침내 핸드백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렵게 사람들을 비집고 출구로 다가가는 그녀를 따라가며 C는 계속해서 문장으로 옮길 수도 없는 욕을 퍼부었다. 그녀가 내 앞에까지 왔을 때 나는 아름다운 여성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본능에 따라 몸을 비켜서 빠져나가기 쉽게 해주었다. 그리고 화장실에 가는 척 비틀거리며 C의 앞을 가로막았다.

C는 입으로는 계속 욕을 퍼붓고 있었지만 자신의 길을 막은 예비군복 차림의 남자가 누구인지 당혹스러워하는 눈치였다. 그가 여자를 쫓아가려고 할 때마다 나는 이리 비틀 저리 비틀 하며 계속 그의 앞을 막았다. 마침내 C는 내 의도를 눈치채고 “넌 누구냐?” 하고 물었다. 나는 가슴에 박힌 명찰과 모자의 계급장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니가 뭔데 길을 막나? 비켜!”

나는 향토예비군의 초능력으로 그녀가 그 집을 빠져나갈 때까지 몇 분 동안만 버티려고 했다. 그런데 그 시간이 지나자 문간에서 못으로 유리를 긋는 듯한 날카로운 여자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야!” 하고. 내가 돌아보자 아랑처럼 한 서린 표정의 그녀가 서 있었다. “이 개 같은 놈아!”

그녀가 고른 용어는 너무나 추상적이고 음전했다. 그러나 그게 욕이 아닌 일상어였으므로 C의 반투과성 고막을 넘어 제대로 의미가 삼투되었다. C가 마사이족 전사처럼 길길이 뛰기 시작해서 나는 그를 붙잡아야 했다. 그녀는 그 한마디 말을 던지고 나서는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와 함께 달아나 버렸다.

남은 C와 나는 별 이유도 없이 두 팔을 마주 잡고 밀었다 당겼다 하며 힘을 겨뤘다. 그는 덩치가 나보다 컸음에도 취한 까닭에 힘이 없어 쉽게 딸려오고 밀려났다. 그는 힘겨루기를 포기하고 내게 욕을 퍼붓기 시작했다. 한국의 예비군 역시 욕설 공방전에서는 세계 어느 나라 현역, 용병에도 뒤지지 않는다. 슬슬 총열을 가열할까 할 때쯤 사람들이 때맞춰 우리를 뜯어말렸다.

그는 사람들에게 끌려가면서도 내게 계속 욕을 해댔다. 선사시대부터 인류가 길들인 수많은 종류의 가축이 내 조상이 되어 등장했고 내가 내 신체기관의 일부와 크기가 비슷하거나 같거나 작다는 추측도 곁들여졌다. 마지막 말은 ‘너는 이제 평생 나한테 욕을 먹으면서 오늘의 일을 후회하게 될 것’이라는 거였다. 내 대꾸는 기껏 “응, 그러자”였다.

다음날 저녁 퇴근을 하고 나서 전날 밤 열두 시 다 되어 어떤 남자에게서 나를 찾는 전화가 걸려왔다는 말을 들었다. 남자는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 다음날 나는 밤 열두 시가 막 넘어 귀가해서 방금 그 남자의 전화가 걸려왔다는 말을 다시 들었다. 다음날 역시 열두 시 넘어 퇴근했더니 전화는 오지 않았다 하고 C의 시집이 한 권 우송돼 있었다.

다음날은 토요일이어서 마침내 그의 전화를 받을 수 있었다. 그는 시집에 쓴 것처럼 내 이름 뒤에 정중하게 ‘형’이라는 단어를 붙였고 자신의 ‘졸시집’을 읽어봤느냐고 물었다. 나는 아직 못 읽었다고 대답했다. 그는 자신의 시집을 읽고 나서 꼭 독후감을 말해달라고 했다.

그 뒤로 나는 그를 대여섯 차례 만났다. 욕설은 물론 반말조차 들은 적이 없었다. 그는 존댓말로 내게 인사를 하고는 빠르게 시비 상대를 찾아 나섰다. 독후감을 말해줄 겨를이 없었지만 그 또한 궁금해하지 않는 듯했다.

성석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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