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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2.25 20:13 수정 : 2015.02.26 15:09

일러스트레이션 이민혜

[매거진 esc] 성석제의 사이(間) 이야기
마추픽추를 달리며 ‘굿바이 인사 장사’를 하는 소년들, 해맑은 얼굴로 ‘비아그라’를 속삭이던 우즈베크 소년들, 그리고 나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곳>, <나의 버킷 리스트 여행지> 하는 식의 여행 권유 프로그램에서 늘 성층권에 자리하고 있는 페루의 마추픽추는 잉카제국의 옛 도시다. 마추픽추는 해발 2400미터의 고지에 있고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공중에 떠 있는 도시로 알려져 있다. 나는 아직 가보지 못했다. 내가 좋아서 내 돈과 내 시간 들여서 하는 여행, ‘안 가면 후회할걸’이라는 협박에 굴해서 따라 하는 것은 억울할 것 같다는 심정이 있어서다.

아랫마을에서 마추픽추로 가는 길은 워낙 가팔라서 지그재그로 뱅글뱅글 돌아가게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버스를 타고 마추픽추에 올라갔다 내려오던 사람들은 한 소년을 만나게 된다. 마추픽추에서 출발할 때 관광객들에게 “굿바이!” 하고 손을 흔들던 소년이 버스가 한 굽이를 돌고 보면 어느새 길모퉁이에 서서 다시 ‘굿바이’ 하고 다시 손을 흔들고 있다. 그런 식으로 버스가 굽이를 돌 때마다 지름길로 뛰어 내려와 ‘굿바이’ 하고 인사를 하니 처음에는 무슨 호객행위를 하는 건지 의심하던 사람들도 소년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다 수십 굽이를 돌 때쯤 되면 탄성까지 지르게 된다. 마침내 버스가 아랫마을에 닿아 지칠 대로 지친 소년이 ‘굿바이’라고 마지막으로 말하면 너나 할 것 없이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들고 소년에게 달려가게 된다는 것이다. 길이 너무 힘들어 이 ‘굿바이 인사 장사’는 하루 두 번 하는 게 고작이라고 한다.

내가 막 소년에서 청년으로 접어들었을 때 국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서 생활하는 내 또래의 청년을 만났다. 그는 설악산이나 지리산처럼 높고 험준한 산의 꼭대기에 있는 대피소며 산장에 등산객이 필요로 하는 여러 가지 물건을 지게에 실어다 주고 일당을 받는 사람 중의 하나였다.

그때 문득 나는 그 소년들이
나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전생이거나 후생이거나 간에
소년들이 흔드는 나리꽃을 향해
나는 손을 마주 흔들어주었다

내설악에서 대청봉으로 올라갔다 외설악으로 하산하던 길이었다. 그 전까지는 1000미터가 넘는 산에 한 번도 올라가본 적이 없던 백면서생이 새벽 네 시부터 산행을 시작해서 해발 1708미터의 대청봉 정상까지 갔다 왔으니 무릎 관절이 화끈거리다 못해 닳아 없어진 것 같아서 겨우겨우 나무지팡이를 짚고 내려가고 있었다. 호랑이처럼 껑충껑충 뛰어내려오다 나를 보고 먹잇감을 본 듯 재빨리 멈춘 남자는 지게를 지고 있었다. 남자는 그 지게에 쌀 한 가마니 무게는 될 짐을 지고 산 아래에서부터 중청봉 대피소까지 올라가서 짐을 부려놓고 다시 내려가는 길이라고 했다. 그에게는 그게 그날의 두 번째 행로였다. 쇠파이프로 만들어진 지게와 그의 골격은 큰 차이가 없어 보였다.

나와 마찬가지로 군대에 가기 전이었던 그 남자는 하산 길에 굴러 다치거나 보행이 원활치 않은 사람이 있으면 지게에 태워갈 수도 있다고 했다. 물론 돈을 받고. 그는 절뚝거리는 내가 지게에 태워달라고 요청하기를 기다리며 최대한 천천히 나를 따라 걸었다. 반면 돈이 없던 나는 어떻게 그의 동정을 사서 공짜로 그의 지게에 얹혀가나 하는 궁리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버티면서 가다 보니 먼 길도 쉽게 줄어들어갔다. 마침내 그는 평소의 반값으로 ‘봉사’를 할 뜻까지 내비쳤으나 내게는 그 돈도 없었다. 고려장 당하는 아버지도 아니고 비슷한 또래의 남자의 지게에 얹혀가는 게 자존심 상하는 일이기도 했다.

설악산의 맨 아래쪽 계곡, 야영하는 사람들의 불빛이 여기저기 보이는 곳까지 와서야 지게꾼은 가외 수입을 포기했다. 나 또한 한결 걷기가 쉬워져서 공짜 구조를 받으려던 생각을 깨끗이 버렸다. 그러면서 비슷한 또래로서 편하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는 하루 평균 두 번, 일년에 오백 번 이상을 짐을 실어나르며 살아가고 있었다. 군대에 다녀와서도 같은 일을 할 것인데 십 년을 작정하고 일하면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산 아래 상가에 작은 가게를 구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아니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가 노총각이 되기 전에 하루빨리 설악산에서 선녀 같은 여인을 만나기를 빌어주었다(한때 선녀가 출몰했다는 전설이 있는 선녀탕이 설악산에 있지만 그는 그곳으로는 일감이 없어 가지 않는다고 했다).

십수년 전 백두대간 종주산행을 계획하고 관련 자료를 챙기던 중에 흥미로운 기록을 발견했다. 한라산을 제외하고 남한에서는 가장 높은 봉우리인 지리산 천왕봉(1917미터)에 무려 천 번을 올라간, 곧 ‘천왕천등’(天王千登)의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운 사람에 관한 것이었다. 전문 산악인도 아니고 아마추어로서 그저 지리산과 천왕봉을 좋아해서 그랬다니 경탄스러운 경지가 아닐 수 없었다. 그는 남들은 며칠씩 걸려서 올라가는 천왕봉을 하룻밤에 두 번 올라간 진기록도 가지고 있었다.

어느 해 연말, 그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새해 일출을 보려고 천왕봉에 올라갔다가 조난을 당하는 사람들을 구조하는 자원봉사를 하기 위해 자정 무렵 천왕봉 바로 아래에 도착했다. 비박 채비를 하던 그는 갑자기 집에 무슨 일이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그길로 산 아래로 하산해 전화가 되는 곳까지 와서 집에 연락을 취했는데 자신이 없어도 큰 문제는 없다는 답변을 들었다. 그는 다시 천왕봉까지 올라가서 다음날 일출 후에 하산하다가 혹 다치거나 해서 구조를 요청할지도 모를 사람을 기다렸다고 한다. 그에게 새해 일출은 관심사가 아니었다.

우즈베키스탄의 실크로드 거점도시인 사마르칸트에서 샤흐리삽스로 가는 노정은 100킬로미터 정도이지만 중간에 상당히 가파른 고갯길을 거쳐가야 한다. 이 지방은 제대로 농사를 짓기에는 강수량이 태부족이고 목축과 밭농사를 겸해 근근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고개를 올라갈수록 길은 험준해지고 황량한 풀숲뿐이다. 그럼에도 집과 마을은 끈덕지게 길을 따라붙는다. 꼭대기에 넓은 개활지가 나오고 고개 양쪽을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에 와서야 그곳에 사람들이 흩어져 살 수 있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전망 때문에? 아니다. 고개를 넘나드는 사람들을 상대로 물건을 파는 것이다.

대추, 허브, 강황 같은 것을 말려서 좌판에 진열해서 파는 노점이 고개 꼭대기에 늘어서 있다. 대부분이 어른들이지만 소년들도 섞여 있다. 나의 어린 시절 이웃집 소년을 연상케 하는 순진하고 해맑은 표정의 소년들은 멀리 떨어져 있는 화장실까지 따라오며 무슨 말인가를 속삭이듯 되풀이해서 건넨다. 좁은 화장실 안에서야 소년들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닫는다. ‘비아그라, 비아그라, 비아그라’였다. 그게 진품인지 복제약인지 가짜인지, 그 지역의 약초로 생산하는 것인지 부작용은 없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사지 않았기 때문에. 좌판에서 굵은 대추 몇 알을 맛보기로 주워 먹었을 뿐.

돌아오는 길에서도 소년들을 만났다. 소년들은 고개 정상의 약간 아랫부분까지 내려와서 지나가는 차량을 향해 무엇인가를 흔들고 있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그건 백합과에 속하는 붉은 산나리였다. 지리산 선비샘 근처에서 여름마다 대여섯 차례 본, 붉은 큰 꽃잎(암술)에 참깨 같은 점이 별처럼 뿌려져 있고 가늘고 긴 수술을 가지고 있던. 그것을 보러, 그것 때문에, 때를 맞춰서 지리산에 몇 번이고 혼자 갔더랬다.

그때 문득 나는 그 소년들이 나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전생이거나 후생이거나 간에. 소년들이 흔드는 나리꽃을 향해 나는 손을 마주 흔들어주었다.

굿바이, 황금의 나날들이여. <끝>

성석제 소설가

※그동안 연재해주신 성석제 작가에게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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