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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르크메니스탄 마리에서 동쪽으로 30㎞ 떨어진 메르브 유적지 안에 있는 키즈 카라 왕궁 모습. 6세기께 흙으로 건축한 궁전으로 높이 15미터의 벽을 수직으로 주름 잡듯 쌓아 만들었다. 함께 한 현지 관광안내인은 자신의 선조들이 재료를 절약하고, 태양의 복사열을 막으려고 고안한 건축물이라고 칭찬을 거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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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 <24> 불교 전파의 서쪽 끝, 메르브
우즈베키스탄의 고도 부하라를 떠나 서남 방향으로 1시간 반쯤 달리니 투르크메니스탄 접경이다. 여기까지는 자라프샨 강이 한복판을 흐르는 오아시스 농경지대여서 면화와 옥수수 밭이 눈길이 모자라게 펼쳐진다. 갖가지 과일이며 채소들이 푸르싱싱하게 무르익고 있다. 저 멀리 시리아부터 중국 장안까지 사막을 가로지르는 오아시스 육로 연변에서는 이 구간이 가장 기름진 곳 같다. 그러나 국경 지대에 다가가니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서슬 퍼런 철조망이 두 갈래로 남북 어디론가 아득히 뻗어간다. 5리는 족히 될 그 사이 완충지역에는 잡초만이 엉켜 있다. 태양 복사열 막으려
주름잡듯 쌓은 벽 이색적
세계문화유산 메르브
110m 높이 성벽 오르니
도시 전체가 한눈에
유물 보려 박물관 들르니
눈에 익은 맷돌 물레가 반겨 삼엄한 두 나라 국경지대를 통과하는 데 네 시간이나 걸렸다. 투르크메니스탄 국경초소에서는 일행 중 한 명만 수속이 남았는데도, 점심시간이라고 창구를 덜컥 닫는 바람에 또 한 시간 넘게 기다렸다. 입국 수속을 마치곤 늦춰진 갈 길을 재촉했다. 40분 달리니 아무다리야 강이 나타났다. 아무다리야는 역사의 풍상 속에서 물굽이만큼 숱한 우여곡절을 겪었다. 강의 물길이 바뀐 내력은 지금도 수수께끼다. 1221년 몽골군이 하류의 우르켄치를 공략할 때 둑을 무너뜨리는 바람에 물길이 서쪽 카스피해로 바뀌었다가 16세기 다시 아랄해로 되돌려졌다는 설이 전해온다. 사막 속 우즈보이에 기다란 하상(河床)의 흔적이 남은 점으로 미루어 물길이 바뀐 것은 사실인 것 같다. 15분쯤 달려서 투르크멘아바드(옛 아무르)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마리에 도착한 것은 밤 9시께다. 인구 8만의 마리는 200년 역사를 지닌, 아담한 공업도시다. 이곳에서 동쪽으로 30㎞ 떨어져서 그 유명한 메르브 유적이 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메르브는 페르시아와 중앙아시아를 잇는 중계지점에 자리잡아 2500여년간 번영해왔다. 11~12세기 터키계 셀주크 시대에는 수도로서 ‘고귀한 메르브’란 존칭까지 받을 정도로 이슬람 세계에서 손꼽히는 대도시였다. 그러나 1220년과 21년 몽골군의 무자비한 유린으로 완전히 폐허가 되어버렸다. 몽골군은 성문을 열면 죽이지 않겠다는 약속을 깨고 6일 동안 22만명을 살육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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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박물관에서 본 봉수병, 물레, 맷돌(왼쪽부터). 박물관 안내인이 물레질을 직접 보여 주기도 했다(가운데 사진). 이곳은 사막 가운데 자리잡은 곳이지만, 농경문화를 위주로 사는 곳이라 우리 것과 닮은 유물들이 많이 발견돼 왠지 도시 곳곳과 사람들이 낯설지만은 않은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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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브는 ‘떠도는 도시’란 별칭도 갖고 있다. 역대 도시가 한 곳에 층층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조대마다 인근에 새 터를 잡고 도성을 형성하곤 했다. 그래서 다양한 시대의 성터가 성벽을 사이에 두고 옹기종기 모여 있으며, 성벽 전체의 길이는 무려 230㎞에 달한다. 그 드넓은 부지에 고대부터 중세까지 5개의 조대가 번갈아 자리잡았다. 가장 오래된 것은 기원전 6~4세기 페르시아 아케메네스조 때의 도넛형 성벽이 남은 에르크 카라다. 당시 메르브는 ‘마르키아나’로 불렀다. 원래 이 성벽은 높이가 110m나 되는, 가장 높고 웅장한 성벽으로서 지금도 위에 올라서면 메르브 전체가 한눈에 들어온다. 남쪽에 있는 게오르 카라 성벽은 기원전 알렉산더 제국이 분열된 뒤 생겨난 세레우코스 시대의 유적이다. 기원후 사산조 시대(3~7세기)까지 근 천년 동안 지탱해 온 고성이다.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주목되는 것은 여러 점의 불교 관련 유물이다. 1961년 두 차례 발굴 끝에 불두와 사리탑, 카로슈티어(서북 인도를 중심으로 중앙아시아에서 쓰인 고대문자)로 씌어진 불경을 넣은 항아리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듣는 순간, 흥분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사실 이곳을 굳이 찾아온 데는 메르브가 유명한 고도라는 매력도 있었지만, 일찍부터 불적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것을 현지에서 확인하게 되면 이곳이야말로 불교 전파의 서단이 될 것이라는 학문적 기대에 부풀어 왔기 때문이다. 당장 현지로 달려가고 싶었으나, 유적 답사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어서 어길 수는 없었다. 이 시대를 이은 고성 유적으로는 이슬람 초기의 대·소 키즈 카라가 있다. 대 키즈 카라는 왕궁인데, 구조상 두 가지 특징이 선명하다. 하나는 둥근 천장이고, 다른 하나는 바깥 주름벽이다. 벽을 수직으로 주름 잡듯 쌓은 것이 퍽 이색적인데, 재료를 절약하고 태양의 복사열을 차단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고도의 건축적 지혜라 아니할 수 없다. 이어 들른 곳은 메르브 고성의 심장부인 술탄 카라다. 가장 번영했던 중세 셀주크 시대의 수도가 남긴 어마어마한 유적들이 눈길을 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전성기를 구가한 술탄 산자르(1118~1157)의 묘당이다. 산자르 시대는 강역이 아제르바이잔까지 아우르고, 수만권의 책을 소장한 도서관만도 8개나 있었으며, 당대 최고 수준의 천문대도 있었다. 성왕으로 추앙된 산자르였지만 그 또한 신이 아닌 인간이었다. 전설에는 그가 천국에 가서 절색의 처녀를 만났는데, 매혹된 그에게 만지지 말것,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지 말 것, 노크 없이 방에 들어오지 말 것 등 세 가지 계율을 주문했으나, 그는 그 어느 것도 지키지 못해, 결국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묘당의 지하에 누워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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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역사박물관에서 본 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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