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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황 석굴, 룽먼 석굴, 윈강 석굴과 함께 중국 4대 석굴의 하나이자 으뜸으로 꼽히는 키질 석굴? 전경. 쿠처 시내에서 1시간 정도 거리인 밍우타그산 절벽에 벌집처럼 굴이 뚫려 있다. 쿠처 왕족 출신의 명승인 구마라습의 청동좌상이 맞은편에서 건너다보고 있다. 둔황석굴처럼 내부 사진 촬영이 금지돼 그저 눈으로만 둘러볼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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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 <12> 키질 석굴과 조선조고 화가 한락연
쿠처는 석굴로 이름난 고장이다. 부근에만 10여곳의 석굴이 널려있어 신장 지역 전체 석굴의 5분의 3 이상을 차지한다. 그중 키질 석굴은 단연 으뜸이며, 둔황·룽먼·윈강 석굴과 더불어 중국 4대 석굴의 하나로 꼽힌다. 특히 굴을 만든 시기가 가장 오래고, 내용물에도 동서 교류적 요소가 많다는 점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뿐만 아니라, 1만여 ㎡에 달하는 벽화의 예술적 가치는 둔황 석굴과 비견된다거나 심지어 더욱 높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이 모든 것을 차치하고라도, 키질 석굴이 더욱 뜻깊게 다가오는 것은 그 실체와 진가가 한겨레붙이의 노력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흥분된 심정을 가까스로 가라앉히며 쿠처와 바이청(拜城)을 잇는 ‘고배로(庫拜路)’를 따라 서쪽으로 67km 떨어진 수게트(蘇格特) 계곡까지 한 시간쯤 달려갔다. 깊숙한 계곡 오른쪽엔 무자르트강(木札爾特江)이 황량한 츠르타크산(却勒塔格山)을 끼고 아득히 흘러가고, 왼쪽으론 깎아지른 듯한 밍우타그산(明屋達格山) 절벽이 2km나 쭉 늘어섰다. 절벽에 벌집처럼 뚫린 것이 유명한 키질 석굴이다.
3년간 옥고 뒤 선생은 평생 소원인 석굴 벽화의 복원작업에 착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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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입은 고대문화 되살린 ‘중국의 피카소’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 <12> 키질 석굴과 조선족 화가 한락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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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석굴군은 3~9세기 약 600년 동안 여러 왕조시대 다양한 내용으로 조성되었다. 벽화는 부처의 본생과 본행, 교화와 공양을 주제로 한 내용이 핵심이다. 벽화 기법에서는 어느 석굴벽화보다도 서역기법을 많이 받아들이고, 중원기법을 가미해 특유의 쿠처풍 도상을 그려냈다. 그러나 소승 신앙으로부터 시작된 불교가 7~8세기에 이르러 대승에 편중되자 벽화 미술은 점차 사양길에 접어든다.
발굴된 236개 포함 300개 넘는 석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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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처 시내에서 키질 석굴이 있는 수케트 계곡까지 가는 고배로. 황량한 돌산 풍광이 끝나면 푸른 숲과 맑은 강이 흐르는 계곡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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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길을 가장 오랫동안 멎게 한 곳은 10동이다. 원래 선방으로 벽화는 없었다. 약 2. 높이의 주실은 방형이고 창문과 벽난로터가 있다. 동쪽에서 서쪽 방향으로 제자(題字)가 길이 3.3, 폭 1.9의 북면 상반부에 세로로 새겨졌다. 글자의 크기는 평균 8~10mm이며 새김 깊이는 0.m 정도다. 그리고 주실 한가운데는 빛바랜 사진 한 장이 갸름한 나무받침대에 놓여있었다. 제자와 사진의 주인공은 중국 조선족 출신의 화가 한락연(韓樂然)이다. 글자는 조수였던 천탠(陳天)이 새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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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처 시내에서 키질 석굴로 가는 길목에 대협곡을 지나 만난 염수계곡. 원래 바다였던 곳이 융기해 육지로 변한곳으로 하얀 가루의 맛을 보니 실제로 짠맛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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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의 원문은 이렇다. “ 본인은 독일의 르콕이 지은 신장문화보고(寶庫)기와 영국의 스타인이 지은 서역고고기를 읽고나서 신장이 고대 예술품을 대단히 많이 간직하고 있음을 알고는 곧 신장에 올 생각이 났다. 1946년 6월 5일 단신으로 와서 벽화를 보니 실로 아름다운 옥이 눈앞에 가득한 것처럼 훌륭한 것이 너무 많았다. 모두 우리나라 여러 동굴들로는 도저히 따를 수 없는 고상한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아쉽게도 대부분 벽면은 외국 고고대(考古隊)에 의해 벗겨졌는데, 문화사에서 일대 손실이다. 본인은 이곳에서 유화 몇 폭을 모사하려고 14일간 머물면서 준비를 충실히 하는 데 진력하였다. 이듬해 4월 19일 조우보우치(趙寶琦), 천탠, 판궈챵(樊國强), 쑨비둥(孫必棟)을 데리고 두 번째로 왔다. 우선 번호를 매겼는데, 정부(正附) 번호(‘韓氏編號’ㅡ필자)를 매긴 동은 모두 75좌다. 그리고 나서 개별적으로 모사·연구·기록·촬영·발굴을 진행하여 6월 19일 잠정적으로 한 단락을 지었다. 고대문화를 더욱 빛나게 하기 위해 참관하는 제위는 이곳을 특별히 애호하고 잘 보관해 주기를 삼가 바라는 바이다.”
파리 유학·반파시즘·항일운동·비행기 추락사
이 제자에서 키질 석굴에 대한 화가의 각별한 애착과 투철한 선구자적 역사문화의식, 그리고 외래 도굴꾼들에 대한 의분을 그대로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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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질 석굴 10호굴 한쪽에 놓여 있는 조선족 화가 한락연의 자화상(1935년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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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선생은 좀더 큰 포부를 안고 프랑스 유학길에 오른다. 역시 식당 잡부로, 신문사 촬영기자로 일하면서 파리의 국립루브르예술학원에 입학해 천부적 화재(畵才)를 다듬질했다. 유학기간 피카소처럼 거리화가란 명성을 얻기도 했고, 유럽나라들을 주유하면서 국제 반파시즘 운동에도 가담했다. 1937년 유럽생활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우한과 충칭, 시안 등지를 전전하면서 좀더 성숙한 모습으로 작품활동과 항일구국투쟁에 헌신한다. 그러던 중 40년 시안에서 국민당 당국에 체포되어 3년간의 옥고를 치른다. 옥중에서도 ‘다리 위에서’를 비롯한 수채화 40여점을 그린다. 출옥 후 란저우로 자리를 옮긴 선생은 평생 소원이던 석굴벽화의 복원작업에 착수한다. 둔황 천불동에 두 번이나 가서 <뇌신(雷神)>같은 모사 수작을 남겼으며, <키질 벽화와 둔황 벽화의 관계>라는 학술논문까지 발표한다. 그리고 46년과 47년 두 차례에 걸쳐 키질 석굴을 탐방해 불후의 공적을 세운다. 키질 가는 길에 투르판에 들러 고창성과 아스타나 등 유적에서 미라를 비롯한 유물 여러 점도 발굴해 학계를 놀래게 했다. 47년 7월 30일 국민당 257호 군용기를 타고 우루무치를 이륙해 란저우를 향하다가 가욕관 상공에서 ‘기후 악화’로 비행기가 추락했다는 것이 선생의 마지막 길에 관한 보도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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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락연이 모사한 키질 석굴의 비구승 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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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화 모사와 미라 발굴 등 불후의 공적
선생은 중국 내서만 20여 차례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165점의 유작(키질 석굴 모사품은 29점)을 남겼다. 그는 서구의 사실주의·인상주의 화풍과 동양 전통의 필묵(筆墨)화풍을 조화시켜 화면의 층차가 분명하고, 입체감이 넘치며, 색조가 묵직하면서도 명쾌하고, 지역특색이 선명한 풍속화, 풍경화, 초상화, 벽화의 모사화 등 다양한 소재의 그림을 그려 ‘유작마다 국보’(‘件件遺作是國寶’)라는 절찬을 받았다. 다행히 한국에서는 1993년과 2005년 두 차례 유작전시회가 열렸으며, 올 8월에는 국가보훈처로부터 독립운동가 포상을 받기도 했다. 한 선생은 ‘중국의 피카소’로서, 열렬한 사회활동가로서, 굳건한 ‘역사문물의 지킴이’로서 시대적 사명에 충실한 지성인의 귀감이었다.
글 정수일 문명사 연구가, 사진 이종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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