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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8.13 17:53 수정 : 2006.08.13 17:53

정태욱 /아주대 법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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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1일 평양의 혁명열사릉에 참배한 노동계 인사들을 처벌하자는 목소리가 들린다. 실제로 보수단체에 의해 고발장이 접수되기도 했단다. 심지어 남북 관계에 해박한 한 법학 교수조차도 그들을 국가보안법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 얘기를 듣자면, 이른바 ‘자유 대한’의 자유란 무엇인지 걱정이 되고, 또 바로 그런 이유로 국가보안법은 폐지돼야 하겠다는 생각을 더욱 갖게 된다.

북한의 혁명열사릉이 어떤 곳인지, 그곳에 묻혀 있는 이들이 항일 열사들인지 아니면 6·25 전쟁과 독재의 원흉들인지, ‘김정일의 생모’ 김정숙이 옳은지 아니면 ‘항일 유격대원’ 김정숙이 옳은지의 문제는 접어두자. 다만, 남북 교류와 협력의 일환으로 북한에서 열리는 5·1절(노동절) 행사에 갔던 이들이 북한 쪽의 거듭된 요청으로 근처를 지나면서 참배를 하게 된 것을 놓고 과연 국가보안법이란 험한 잣대를 들이미는 것이 상식에 맞는 것인지 따져볼 일이다.

참배한 사람들의 속은 알 수 없다. 단지 상대에 대한 예의 차원에서 응한 이들도 있을 것이고, 정말 북한 건국의 주역들을 존경해서, 혹은 심지어 6·25 전쟁을 ‘해방전쟁’으로 생각하며 참배한 이들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그 사상을 이유로 혹은 단순히 그 참배 행위를 이유로 처벌하는 것은 자유민주주의 원리에 맞지 않는다.

물론 보기에 따라서는 그들의 행위를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하는 ‘찬양·고무’ 행위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는 본디 그와 다른, 심지어 적대적인 견해라도 그것을 국가권력으로 억압하는 것에는 반대하는 체제다. 생각과 신조의 차이를 인정하고 그것을 오히려 인간사회 약동의 원천으로 보는 것이 자유민주주의다. 사상의 일체성을 국가적으로 강요하는 것은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가장 경계하는 바다. 그렇게 해서 나온 법리가 바로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의 이론이라는 것인데, 표현의 자유, 특히 정치적 표현의 자유는 실제 정말로 위험한 경우가 아닌 한 폭넓게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대법원 판례는 여기에 한참 뒤떨어져 있다. 아니, 이미 1990년대 초 이회창씨가 대법관으로 있을 당시 소수의견으로 제출했던 ‘가능하고 구체적인 위험의 법리’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 비록 하급심이기는 하지만 강정구 교수에 대해서도 결국 유죄가 선고되었으니, 우리 법원이 헌법의 제일 원리로 삼는 것은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국가보안법주의’인지도 모르겠다.

더욱이 이번 사건의 일차적인 적용 법규는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이다. 이 법의 제3조는 남북교류와 협력에 관하여는 다른 법률에 우선해 이 법을 적용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 조항은 2005년에 개정됐다. 이전에는 ‘정당하다고 인정되는 범위 안에서’ 다른 법률에 우선한다고 하여, 국가보안법에 의한 심사를 허용하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했던 데서 바꾼 것이다. 설혹 참배에 문제가 있다고 하여도 남북 교류·협력의 시각에서 말하는 것과 국가보안의 시각에서 말하는 것은 아주 다를 것이다. 걸핏하면 국가보안법을 들먹이는 것은 우리 자유민주주의의 수준만 떨어뜨리는 것이다.

이미 지난해에 북한의 정부 대표단은 우리 국립 현충원을 공식 방문하고 참배한 바도 있다. 남북의 교류와 협력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한반도 평화는 그만큼 더 진전된다. 이제 이와 같은 시시한 문제로 험악한 소리를 만들어 내 남남 그리고 남북의 악감정만 키우는 아둔한 짓은 그만두자.

정태욱 /아주대 법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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