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08.31 21:52
수정 : 2006.09.01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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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범신 소설가 명지대 문예창작과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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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며칠 동안 전화가 빗발쳤다. 정치 입문을 축하한다는 전화도 있고 당신이 그럴 줄 몰랐다는 비난의 전화도 있었다. 심지어 이제는 현장에서 떠나 변방에 밀려나 있는 낯선 사람이 다시 정치를 하고 싶으니 줄을 대달라는 웃지 못할 부탁의 전화까지 있었다. 최근에 발족한 ‘희망연대’의 발기인으로서 언론에 나의 사진이 집중적으로 실려서 생긴 해프닝이었다. 발기인이야 수십 명일 터이지만 ‘고건호에 탄 사람’으로서 사진으로 클로즈업된 사람은 한둘에 불과하니, 마치 내가 유력한 ‘대권후보’의 정치캠프에서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는 것처럼 회자된 것이었다. ‘고건호에 탄 사람’은 그나마 약과이고, 발기인 대회에 참석하지도 않았는데 ‘참석했다’라고 쓴 기사도 있었고, 문화계 브레인의 핵심적 인사라는 식의 말도 나왔다.
내가 희망연대의 발기인인 것은 사실이다. 지난 7월 티베트의 성산 카일라스로 한 달 동안 여행하려고 짐을 꾸릴 때 평소 알고 지내는 한 의원이 찾아와 희망연대의 발기인이 돼 달라고 했다. 뜻은 좋으나 고건씨가 대권후보의 한 사람으로 거론되는 걸 모르지 않아 오해의 소지가 있을 듯하여 사양하자, 그 의원은 희망연대는 정치단체라기보다 시민단체이고 나중에 혹 정치단체의 성격을 띠게 되면 내 뜻을 정확히 반영하겠다는 약속 아닌 약속을 했다. 작가 외길로 살아온 내겐 그런 약속조차 사실 우스운 경계에 지나지 않았다. 좋은 뜻이 있다면 ‘뜻’을 ‘발기’하는 것이야 뭐 그리 대수로운 일이겠는가 하고 자못 소박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그 일로 하여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이렇게 빗발치는 전화를 받게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놀라운 일이다. 정치나 정치가에 대한 혐오와 비판이 하늘에 이른 줄 알고 정치 무관심병을 오히려 염려한 적도 많았는데, 아직도 너무 많은 사람이 여기에 예민한 촉수를 들이대고 있다는 데 우선 놀랐다. 아마 정치판이 우리 삶에 아직도 너무 많이 간여하고 있다는 것의 반증일지도 모르고, 야만적인 욕망과 그럴듯한 명분주의에 동시에 함몰돼 있는 이중성의 단층이 심한 우리 세태를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대부분의 대중들이 너무도 허접스러운 엉터리 정보에 의지하여 어떤 결론에 쉽게 도달해 버린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신문에 실린 사진 한 장으로 아무개는 정치적으로 어느 편이라는 식으로 편을 가르고, 그도 권력이나 천박한 세속적 욕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삼류’라고 단정하는 식이다. 어떤 이가 평생 어떤 지향을 품고 어떤 원칙을 지키고 살아왔는지는 가십성 기사 한 줄에 한순간 물거품이 되고 만다.
그리고 더욱더 놀라운 것은, 일반 대중들의 그런 단순하고 폭력적인 예단을 선도하고 있는 것이 바로 오늘의 언론이라는 사실이다. 일부 대중이나 대중을 선도하는 일부 언론인이나 지식인들 사이에 정보와 판단을 위한 인식의 편차가 너무도 없다는 데 나는 아직도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그들의 비천한 사고체계를 좇아 어떤 진실이나 사실에 대해 물으려고 하지도 않고 허접스러운 가십성 정보에 의지하여 너무도 쉽게 감각적 결론에 도달하며, 자신들이 지어낸 결론을 과신하는 이상한 병에 걸려 있다. 무서운 일은 그런 결론들이 우리 사회, 우리 삶의 중요한 환경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허위로서의 무수한 ‘결론’들이 정치판, 언론판, 문화판을 좀먹고 있다면, 어찌 무섭다고 하지 않겠는가.
박범신 소설가 명지대 문예창작과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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