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7.03.05 17:38
수정 : 2007.03.05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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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웅/독립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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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일본이 미국 하원의 일본군 위안부 규탄 결의안 채택을 저지하려고 총력전을 펴고 있다. 로비 이름의 뒷거래를 통해 역사적 범죄를 은폐하려는 야만행위다. 3·1절날 일본 아베 신조 총리는 “강제동원의 증언 또는 입증된 것이 없다”면서, 군대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인정한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의 담화(1993년)까지 부정하는 발언을 했다. 일본군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최대 20만 명의 여성을 성노예로 내몬 일은 수많은 ‘증언’과 자료로 ‘입증’됐다.
미국 하원에는 1996년 이래 여덟 차례나 군대위안부 규탄 결의안이 제출됐지만 일본의 로비로 모두 폐기됐다. 민주당이 다수 의석을 차지하면서 결의안 통과 가능성이 높아져 올해 다시 상정되자 일본의 총력 로비가 시작된 것이다. 아베 총리는 2월 중순 홍보보좌관을 미국에 보내 의회와 언론 상대로 로비를 벌이게 하고 자신은 4월에 건너간다고 한다. 과거 일본의 한국 관련 대미 로비는 항상 우리에게 치명적이었다. 1905년 루스벨트 대통령의 대학 동창을 미국에 보내 로비 끝에 필리핀은 미국, 조선은 일본이 차지하는 태프트-가쓰라 밀약을 맺었다. 그 결과 한민족은 40년 동안 참담한 식민통치를 겪었다.
일본의 로비는 제2차 세계대전 뒤에도 계속됐다. 1946년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의 외교정책 전문가 조지 케넌은 일본의 로비에 따라 아시아 지역에서 소련 영향력의 봉쇄 방안으로 일본의 옛 식민지 한국과 만주를 다시 일본에 넘긴다는 시나리오를 마련했다. 다행히 국제정세의 변화로 불발됐다. 1951년 9월 샌프란시스코 대일 강화회의 때 미국은 초안에서 한국령으로 명시한 독도를 일본의 로비로 삭제했다. 애초 영국과 미국이 만든 초안이 바뀐 것이다. 이는 지금 일본이 독도를 자국 영토라고 주장하는 빌미가 됐다. 일본의 로비로 한국 대표의 회의 참석도 봉쇄되었다.
미국이 최근 전시 작전통제권을 2012년에 넘기기로 한 것은 한국 대통령선거에서 반미 감정을 예방하기 위해서라는 분석이 있다.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어렵지만 분명한 것은 일본의 로비로 이번에도 규탄 결의안이 폐기된다면 반미 여론은 걷잡기 어려울 것이란 점이다.
미국은 19세기 이래 러시아의 동진정책을 봉쇄하고자 일본과 손잡았다. 러-일 전쟁 때도 일본을 지원했다. 키워준 ‘사자새끼’는 진주만 공격으로 보답했다. 새뮤얼 헌팅턴 교수는 중국의 국력이 미국과 비슷해지면 일본은 중국의 줄에 설 것이라 내다본다. 지금 다시 중국의 팽창을 막고자 일본 평화헌법의 폐지와 군사대국화를 방치하거나 부추긴다면 언젠가 워싱턴이 기습당할지도 모른다. 미국은 ‘칼과 국화’로 상징되는 일본의 이중성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지난달 16일 미-일 동맹 중심의 아시아 전략을 추구하는 미국의 새 아미티지 보고서가 채택됐다. <미-일 동맹: 2020년 아시아질서 바로잡기>란 보고서는 미-일 동맹을 너무 중시할 경우 미-일이 아시아에서 고립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보고서는 “2020년에 예상되는 지역적 질서나 19세기 세력균형 구도로의 회귀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아직도 많은 한국인은 미국의 ‘건국정신’을 믿는다. 하원 외교위 아태환경소위 청문회장에서 한국인과 호주 국적 네덜란드인의 피맺힌 증언을 들었다면 가해자의 로비로 ‘인류사적 범죄’를 덮어선 안 될 것이다. “일본의 만행을 참회하는 날까지 내 전쟁은 끝나지 않는다”는 김군자(81) 할머니의 한 서린 증언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미국의 건국정신이 살아 있다면 이번 규탄 결의안을 일본의 로비와 교환하지 말 것을 촉구한다. 대제국이 도덕성을 상실할 때 붕괴했다는 사실을 ‘우방 아메리카인들’이 되새겼으면 한다.
김삼웅/독립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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