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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10.12 18:05 수정 : 2007.10.12 18:09

김정기/제주교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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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호아빈 초등학교의 교실 준공식과 2학기 개강식에 초청받아 다녀왔다. 호아빈이란 평화란다. 이 곳에 충북 민예총 일꾼들이 모은 성금 2500여만원으로 교실 8개를 지었다. 푸옌성의 성도 ‘투이호아’에서 학교로 가는 40여분의 길.

작렬하는 햇빛으로 익어가는 노란 벼 바다 위에 농부들의 원추형 모자가 점점이 배처럼 떠 있는 들판, 이 들판 가르마길에 마치 분무처럼 일으킨 뽀얀 먼지 안개 너머로 흰 구름을 인 저 멀리 산과 산의 연봉들, 야자수와 망고나무를 빼면 천상 우리 산과 들이다. 이곳에서 우리 따이한 군인들이 1800여명이나 죽였단다. 1965년부터 8년간 이 나라 곳곳에서 학살당한 수가 4만여명(우리 군은 4천여명으로 추산). 그런데 그 대부분이 노약자나 여인들이란다.

미군이 전투기와 대포로 융단폭격한 뒤에 우리 군이 투입되었기에 베트남 민중의 증오가 미군보다 우리에게 집중되었다고. 때문에 이 나라 도처에 “하늘에 가 닿을 죄악 만대에 기억하게 하리라”는 ‘따이한 증오비’가 100여개나 된다고 한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 국방장관 맥나마라가 자서전에서 이 전쟁을 ‘수치의 전쟁, 실패한 전쟁’으로 규정했고, 또 세계가 우리나라를 미국의 식민지 또는 용병으로 낙인 찍어버린 이 ‘더러운 전쟁’ 시기에, 우리 국민들은 ‘자유’를 지키는 용사들의 계속되는 승전보에 환호하고 있었던 것이다.

베트남 최대의 곡창 지대를 가로지르는 차 안에서 구수정(통역자이며, 교실짓기 운동의 공헌자)님이 들려준 다음 노랫말에 내 가슴은 벼 쭉정이처럼 텅 비고 말았다. ‘아가야 이 말을 기억하거라/ 적들이 우리를 폭탄 구렁텅이에/ 몰아넣고 모두 쏘아죽였단다/ 아가야 이 말을 꼭 기억하거라.’ 이 자장가는 빈호아사라는 곳에서 지금도 불리워지고 있다.

호치민 국제공항 입국심사대에서 밀짚모자를 벗으라 을러대는 직원의 세모꼴 눈초리나, 팁으로 준 1달러짜리 빳빳한 지폐를 꾸깃꾸깃 꾸겨서 제자리에 놓는 호텔 직원의 우악스런 손가락이 떠올랐다.

그 학살터 중 한 곳의 가까운 지역에서 충북 민예총 일꾼들이 전대미문의 예지에 넘친 역사적인 선행을 했다. 2005년 4월 문화예술 교류차 푸옌성에 온 민예총 간부들의 눈에 20여명의 어린이들이 나무그늘에서 수업받는 모습이 띄었다. 순간 예술가들의 재기에 찬 상상력이 작동돼 이심전심 ‘교실 짓기’를 구상했다.

그로부터 2년간 노래패, 춤패, 사물놀이패가 공연으로 돈을 모으고 도종환님이 <해인으로 가는 길> 시집 인세를 모두 내놓고 이철수님이 판화를 기증하여 모은 돈이 2년 동안 2500여만원, 여기에다 책걸상, 컴퓨터 등 집기류 마련 행사에 청주시민이 대거 동참하여 단박에 2500여만원을 더 모았다 한다. 베트남에서 제일 시설이 좋은 어린이학교가 된 것이다.

학교 행사하는 날, 우리 옛 시골 운동회처럼 흥겨운 잔칫날이었다. 싱그러운 살푸슴(미소) 띠면서 한 줄로 늘어선 10여명 여선생님들의 하양·파랑·빨강 아오자이가, 다가선 탈춤의 몸짓에 탄성을 지르는 어린이들의 와와! 하하! 함성에 하늘거린다.

그 너머 퍼져앉은 동네 할머니 할아버지 아저씨 아주머니들의 함박 웃음꽃이, 우기에는 무릎까지 빠지는 수렁을 시멘트로 단장한 운동장 곁에 터 잡은 8개 교실에 아롱진다. 여기에선 베트남 사람과 우리가 하나가 되었다. 세모꼴 눈초리도 우악스러운 손도 없었다.

귀국하는 기내에서 민예총 어느 일꾼의 말 한마디가 내내 잠을 쫓았다. “100년간 전쟁하면서 베트남 사람들은 ‘전쟁과 함께 살자’고 했답니다. 우리 민예총도 앞으로 호아빈 초등학교와 함께 살아갈 겁니다.”

김정기/제주교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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