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8.01.28 20:05
수정 : 2008.01.28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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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모/재일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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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잃어버린 10년’을 되찾아야 한다고 목청을 높여 떠드는 사람들이 많고, 일본 매스컴도 이번 선거 결과에 대해 회심의 미소를 감추지 못하고 은근히 우리의 남북관계가 예전과 같이 뿔을 맞대고 우열을 다투는 험악한 대립으로 되돌아가기를 바라는 눈치가 역력하나, 아마 그들이 바라는 대로 상황이 되돌아가지는 않으리라 나는 확신하는 바이네.
그들이 말하는 ‘잃어버린 10년’이란 실상 따지고 보면 단지 10년뿐만이 아니지. 그들이 잃은 것은 ‘6월 민중항쟁’으로 확립된 ‘87년 체제’ 이후의 20년이며, 이 20년을 우리가 싸워 그 결과로 손에 쥔 20년이라고 해야 옳지 않겠나? ‘민중항쟁’이 있었음에도 민주진영의 실책으로 얻은 어부지리 덕분에 출현한 노태우 정권만 하더라도 겉모양으로는 군사정권이 틀림없으나 실질적으로는 ‘6월항쟁’이 가져다준 ‘6·29 선언’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정권이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금후 남북관계는 소모적인 대립관계에서 지양될 것이다”라는 ‘7·7 선언’(1988년)이 나온 것 아닌가? 스스로를 ‘문민정권’이라 일컬은 김영삼 정권도 결함정권이긴 했으나 그래도 “아무리 동맹국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민족보다 더 중요할 수는 없지 않은가”라고 단언한 취임사의 귀절은 찬사를 받을 만한 것이었고, 재임 중 ‘하나회’를 척결함으로써 군 내부의 파벌세력을 제거한 일 같은 것은 김영삼씨였기에 가능했던 위업이 아니었을까 생각할 때도 없지 않네.
여기서 내가 절실히 느끼는 것은 ‘87년 체제’가 노태우·김영삼 두 정권을 거치면서도 흔들리지 않고 꿋꿋하게 ‘6월 민중항쟁’의 정신을 견지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항쟁 직후인 1989년 4월 민중항쟁을 직접 지도한 문익환 목사가 위험을 무릅쓰고 평양을 방문하여 김일성 주석을 만나 민족의 미래를 개척하는 ‘4·2 공동성명’을 발표한 사실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네. 문 목사로 말미암아 나왔던 ‘4·2 공동성명’이 없었더라면 김대중 대통령의 ‘6·15 공동성명’도 있을 수 없었다는 것이 나의 확신일세.
지난번 노무현, 김정일 두 정상이 평양에서 만난 뒤 발표된 ‘10·4 공동성명’을 읽어 가면서 감명이 깊었던 것은 전문에 두 번, 제1항에 두 번, 합해서 네 차례 ‘6·15 공동성명’이 언급돼 있으며 “남북 관계는 이 성명의 정신에 따라 확대 발전시킨다”고 명시돼 있다는 사실이었네. ‘10·4 공동성명’은 국무회의 심의 의결 과정을 거쳐 대통령이 공포해 발효된 문건이며 이명박 차기 대통령도 그 테두리를 크게 벗어나는 일은 있을 수 없을 걸세.
노무현 ‘참여정부’로부터 민심이 이탈한 결정적인 이유는 빈부 간의 격차가 보여주는 경제정책의 실패였다고 듣고 있는데, 그것은 아마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겠으나, 이런 현실은 자본의 이윤을 지상 목적으로 삼고 기업 간의 무한경쟁을 선동해 온 이른바 신자유주의 내지 세계화 정책을 추구해 온 미국의 현실이기도 하네.
충실하게 미국을 본떠 자본 내지 시장 지상주의를 추구해 온 일본만 하더라도 전세계 유명 브랜드의 사치품을 파는 상점들이 요즘 눈에 띄게 수가 늘어나 도쿄 긴자 상가에 밀집한 한편에는 법적인 생활보호에서조차 밀려나 문자 그대로 기아에 허덕이며 거리를 방황하는 노숙자, 도시빈민 패자 무리가 전국 방방곡곡에 넘쳐나는 것이 현실이 아닐까 하네.
아무튼 귀군들의 그 열화와 같은 정열은 ‘광주항쟁’이나 ‘6월항쟁’과 같은 시련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니만치 겸허하게, 그러나 당당하게 찬밥 신세를 거치면서 진실로 야당다운 야당으로서 권토중래의 때를 겪는 것은 결코 무의미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믿고자 하네. 건투를 빌어 마지않네.
정경모/재일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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