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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3.10 20:23 수정 : 2008.03.10 20:23

김선정/경기 남양주시 풍양초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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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기초가 되면 아동 기초조사표를 나눠준다. 학교 끝나고 무얼 하며 지내느냐는 질문에 적힌 답을 보니 착잡하다. 6학년 아이들 평균 귀가시간이 저녁 8시. 심한 아이들은 9시가 넘기도 했다. 학교에서 여섯 시간 수업을 꼬박 마치고 숨 돌릴 새도 없이 학원이니 공부방이니 하는 데를 가서 꼼짝없이 네 시간 수업을 하는 것이다. 집에 가서도 숙제를 해야 하니 잠자는 시간을 빼고는 대부분의 시간을 ‘공부’에 묶여 지내고 있는 셈이었다. 시골 읍에 사는 우리 학교 아이들의 현실이 이렇다. 6학년 담임을 오랜만에 맡게 돼 이 녀석들에게 제대로 된 ‘공부’를 시켜보리라 결심했다. 좋은 책도 많이 읽히고 글도 쓰게 하고 함께 토론도 좀 해 보아야겠다는 야심찬 결심 말이다. 그러나 아이들의 하루 일과를 보니 이 결심이 무모하다는 생각이 든다. 9시에 집에 들어오는 애들이 언제 좋은 책을 읽고 글을 쓰겠나? 그것까지 하라는 건 이 아이들에게 너무 가혹한 일이 아닌가 싶다.

며칠 전 중1 학생들이 전국적으로 통일된 진단평가를 일제히 치렀다. 서울시 교육청은 학생별 개별 과목 점수와 전국 평균, 학교 평균 등을 성적표에 기재해서 자신이 이 도시에서 몇 % 안에 드는지, 학교에서 몇 % 안에 드는지 알게 하겠다고 했다.

오늘은 전국 모든 초등학교 4·5·6학년 아이들이 시험을 치르게 된다. 학년별 1%의 결과만 제출하면 되는 이 시험 역시 대부분의 교육청에서 모든 학교가 다 치르도록 했다. 이미 중학교 시험에서는 몇몇 선생님들이 답안지 제출을 거부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저 아이들의 수준을 ‘진단’만 하겠다는 이 ‘순수’한 시험에 학원들이 들썩이며 학부모들을 겁주고 아이들은 자신이 전국 꼴찌라는 것이 밝혀질까 봐 겁을 먹고 있다. 학부모들에게 아이들의 성적과 수준을 친절하게 알려주고 사교육을 통해 성적을 올리도록 하는 것이 이제 앞서가는 공교육 서비스가 되려는 모양이다. 전에 명문대에 자식을 입학시켰다는 어떤 분의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거기에 이런 대목이 있었다. 학교에서 전국 단위의 시험을 치러서 성적을 정확히 알려주지 않는 것은 공교육의 책임을 방기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 때문에 사교육 기관에 돈을 주고 아이 수준을 파악해야 한다며 마구 흥분해 우리나라 공교육의 문제점(?)을 비난하고 있었다. 학원에 돈을 주고라도 아이의 전국 석차를 알고 싶은 학부모들과 그들에게 학원 못잖은 서비스를 하고 싶은 공교육의 의지가 본격적으로 발동될 태세다.

이제 어떤 일이 일어날까? 못사는 아이들은 공부 못하는 아이들이라는 것이 등식이 되어버린 지금, 시골 아이들, 저소득층 아이들이 많은 지역은 전국 석차의 뒷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같은 지역 안에서도 가난한 아이들이 많은 학교는 꼴찌를 면치 못할 것이고 덩달아 거기 근무하는 교사들은 실력 없는 선생으로 낙인이 찍힐 것이다. 교사들은 그런 낙인이 찍히고 싶지 않아 못사는 아이들이 있는 학교에서는 근무를 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학부모들도 자신의 아이가 다니는 학교가 실력 없는 학교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 끔찍한 결과는 벌써 현실이 되고 있다. 엊그제 신문에 어느 새도시 학교가 교무실, 음악실도 없이 콩나물시루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는 기사가 나왔다. 그런데 그 이유는 임대아파트 애들과 함께 학교를 다닐 것을 우려한 학부모들이 새 학교 개교를 막았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뭐가 더 나빠질 수 있겠는가 싶은데도 현실은 보란 듯이 점점 더 나빠진다. 엄마가 호프집에서 일하시느라 새벽 두 시에 들어온다는 우리 반 ○○이. 학교에서 나눠준 설문지를 해 오려면 아침에 어머니를 깨워야 하기에 결국은 지각을 해야 하는 우리반 ○○이가 우리반 꼴찌에서 전국 꼴찌가 될 날이 머지 않았나 보다.

김선정/경기 남양주시 풍양초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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