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8.05.21 19:11
수정 : 2008.05.21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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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석 이화여대 법대 교수·국제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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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올해 4월에 합의된 한-미 사이의 쇠고기 관련 합의문을 둘러싸고 많은 논쟁이 전개되고 있다. 국제법 특히 조약법을 연구하는 필자로서는 이 합의문서의 법적 지위는 무엇인가에 관심을 갖게 된다. 이 점에 대한 정부의 설명은 일관적이지 않은 듯하다. 법적 효력이 없는 양해각서(MOU)라고도 하고 법적 효력이 있는 국제법상 조약 또는 행정협정에 해당한다고도 한다. 이러한 논란은 차치하더라도 현 단계에서 이 합의문의 재검토나 수정은 가능한가?
이 합의문이 국제법상 조약 또는 행정협정의 일종이라 하더라도 현 단계의 합의문은 아직 정식으로 발효되지 않은 교섭과정 중의 문서이기 때문에 수정이나 재검토가 가능하다. 즉, 현 단계의 합의문은 한-미 양국의 교섭대표가 합의해 채택한 문안으로서 이를 조약체결 절차상의 용어로 설명하면, 한-미 양국의 교섭대표는 가서명(initial)을 한 것이다.
국제법을 보면, 조약이 국제적으로 효력을 가지려면 가서명이 아닌 정식 서명을 하거나 대통령이 비준 등을 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런데 이번 합의는 국무회의 심의, 정식 서명, 국회 동의, 대통령의 비준 절차 등 우리나라의 통상적인 조약체결 절차를 거치지 않고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이 고시만 하면 효력을 갖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 다른 조약의 체결 절차에 비해 대단히 특수하고 간략한 절차이며 국내법적으로 위헌 소지도 있다. 다만, 우리 정부에서 통상 관련 조약을 이런 절차에 따라 체결한 사례가 다수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별도의 ‘조약체결절차법’이 없고 헌법이나 정부조직법 등에 의해 조약체결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통상 관련 조약의 체결 절차가 아직 정비되지 않은 점도 이번 사태의 원인 중 하나다.
이런 특수성에도 불구하고 현 단계의 합의문은 아직 발효되지 않았고, 농림수산식품부가 고시한 뒤에만 우리 정부가 이 합의문을 준수할 의무가 발생하고 이 합의가 발효될 수 있다. 즉, 농림수산식품부의 고시가 이 합의문의 기속적 동의 표시이자 발효조건으로 보인다. 가서명 단계에서는 합의된 내용도 필요 시 수정하거나 변경할 수 있다는 것이 국제법상 인정된다. 조약법에 관한 비엔나협약 제11조도 가서명만으로는 조약에 대해 국가가 법적으로 기속되지 않는 것이 원칙임을 밝히고 있다. 심지어 조약의 정식 서명 뒤에도 비준이 필요한 조약이 비준이 되지 않는다면 조약이 발효되지 않는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바로 그러한 예다. 발효하기 전의 조약은 국가를 법적으로 구속할 수 없는 것이 국제법의 원칙이다.
우리 정부가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의 고시로서 이 합의문을 고시할 경우에는 쇠고기 합의문이 발효하게 된다. 그런데 현재의 합의문이 변경 없이 그대로 발효한다면 검역주권의 포기 논란과 함께 조약 체결 절차상의 위헌·위법 논란이 발생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만일 이 합의문이 고시돼 발효 절차를 완료했음에도 위헌 무효가 돼 국내법적인 효력을 가지지 못한다면, 한-미 사이의 정치적·법적 논란이 현재보다 더욱 커지게 될 것이다.
이번 한-미 사이의 쇠고기 합의 문안이 고시되지 않은 현 단계에서 우리 국민의 입장이 좀더 충실히 반영되도록 재검토하는 것이 우리 헌법과 국제법에 보다 부합하는 방안이 될 것이다. 또한, 한-미 통상장관 사이의 서한도 법적 효력이 있는 각서교환(exchange of notes)이 되려면 양국에서 조약체결 절차를 거쳐야 한다. 그러나 이 서한은 조약체결 절차를 거치지 않아 정치적 의미는 있지만 법적 구속력은 없다. 이같은 시행착오를 막으려면 기존의 통상 관련 조약의 체결 절차를 재정립해야 할 것이다.
김영석 이화여대 법대 교수·국제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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