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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7.21 20:10 수정 : 2008.07.21 20:10

김기창 고려대 교수·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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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웅변가로 알려진 로마의 정치인 키케로는 변호사였다. “법의 극단적 적용은 최악의 부정의이다”(summum ius, summa iniuria)라는 말은 그가 변론 중에 한 유명한 말이다. ‘법대로 한다’고 해서 언제나 정의로운 것은 아니다. 법은 선과 형평을 구현하는 수단일 수도 있고, 사악한 부정의를 저지르는 도구일 수도 있다.

정부의 최근 조처들은 무엇이 법이고, 무엇이 옳은지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전직 대통령이 재임 중 생성된 문서를 빼돌려 청와대에 문서가 거의 남아있지 않다는 주장을 현 대통령의 ‘관계자’가 제기하였다. 얼핏 심각하게 들리는 이 주장을 접하고 관련 법을 확인해 보니, 대통령 기록물은 국가기록원에 대부분 이관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니 전임 대통령 기록물이 현재 청와대에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자 청와대는 전직 대통령이 그 기록물을 복제하여 사본을 가지고 있으니, 그 사본도 국가기록원에 반환해야 한다고 주장을 바꿨다. 법을 다시 보니, 전직 대통령은 그 재임 중 생산된 기록물을 열람할 수 있고, 정부는 열람 편의를 제공하도록 되어 있다.

어쨌든, 청와대가 전직 대통령 보좌관 등을 고발하겠다고 나서자, 전직 대통령은 사본을 반환하기로 하였다. 청와대의 법률가들은 ‘열람’과 ‘복사’는 법률상 엄연히 다르며, 열람 용도로 복사하는 과정에서 국가기록원의 양해가 있었더라도 ‘복사할 수 있다’는 규정이 없으므로 복사는 불법이고, 따라서 일단 고발을 하면 ‘걸어 넣을 수는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시골에 사는 전직 대통령에게 그 재임 중 기록을 열람하고 싶으면 경기도 성남에 와서 보라는 태도가 ‘열람에 필요한 편의’를 제공하는 것인지는 명문 규정이 없다.

이른바 ‘광우병 괴담’ 진원지로 정부가 지목하고 명예훼손으로 고발한 ‘피디수첩’ 프로그램에 대해 검찰이 수사하고 있다. 제대로 걷지 못하는 소를 ‘광우병 의심 소’라고 표현하고, 광우병 쇠고기를 섭취하면 인간 광우병에 걸릴 확률이 매우 높다는 보도는 ‘피디수첩’이 원조가 아니다. 현 정부 취임 직전인 올해 초까지 조·중·동이 거듭 보도한 내용이다. 지난 정부가 이런 보도에도 그 명예가 훼손되지 않은 이유는 미국산 쇠고기 전면 수입을 거부하고, 검역권을 고수했기 때문이라고나 할까. 지난 16일,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피디수첩’ 제작진에게 ‘시청자 사과’를 명하는 결정을 다수결로 밀어붙였다. 현 정부 들어 태도를 돌연히 바꾸어 미국산 쇠고기가 절대 안전하다고 연일 선전해 온 신문들처럼 신속·과감하게 변신하지 않은 <문화방송>은 그 무모함과 눈치 없음을 시청자에게 사과하라는 뜻이리라. 무엇이 공정하며, 무엇이 객관적인지를 정해 둔 명문의 규정은 없다. 그러나 위원 다수가 찬성하면 방통심의위의 제재 결정이 가능하다는 규정은 있다. 따라서 이 규정을 동원해 해당 방송사를 ‘걸어 넣을 수 있다’는 법률가는 분명히 있을 것이다.

정부와 법원은 이런 조처들이 ‘적법’하다고 판단할지 모르겠으나, 과연 그 판단이 정의로운지는 그들이 판정하는 것이 아니다. <시경>(詩經)의 다음 귀절은 동서고금의 위정자와 법관들이 언제나 숙연히 음미할 가치가 있다. “깊은 물가에 있는 듯, 살얼음 판을 디디는 듯 두렵고 떨린다.”(논어, 8:3) 권력을 행사하는 자는 자신이 종국적 권위를 가지는 것으로 착각하기 쉬우나,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물 위에 위태롭게 부유하는 자신의 처지를 직시해야 한다.

김기창 고려대 교수·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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