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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8.05 21:30 수정 : 2008.08.05 21:30

허상수 포럼 진실과 정의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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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복더위에 웬 음습한 냉전시대의 한기인가? 국방부는 ‘장병의 정신전력에 저해요소’를 제거한다며 23종의 교양서를 ‘볼온’하다고 낙인찍는 황당무계한 사건을 일으켰다. 군대는 세계화, 경제, 통일, 재벌, 문화, 역사, 철학서와 함께 평전과 소설까지 북한 찬양, 반정부와 반미, 반자본주의라는 이유로 신판 ‘분서갱유’를 단행했다. 이런 짓은 ‘책을 읽는 선진사회 만들기’에 역행하는 반문화적 횡포, 국가 후진화다. 독서를 금지하는 건 반문명적이고 부도덕하다.

시민 교양서의 금지조처는 21세기 첨단 과학기술 시대에 장병들을 우매화, 파편화, 단순화함으로써 이들을 피동적, 소극적인 수족으로 전락시킬 우려가 크다. 정보사회에서 상상력과 재치, 기지와 순발력, 다양성, 비판정신의 발양은 토론과 독서, 학습을 통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이 광란극에서 주목할 점은 현기영의 성장소설 <지상의 숟가락 하나>가 속죄양으로 선정되었다는 데 있다. 이 작품은 한 공중파 텔레비전 방송의 독서캠페인 프로그램의 권장도서로 45만부나 팔려나간 스테디셀러다. 우리 군대는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나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같은 성장소설도 불온시하여 금지한다는 말인가.

만약 작가가 유년시절에 겪은 ‘제주 4·3 민간인 학살’에 관한 아주 적은 분량의 단편적 묘사 때문에 국방부가 이런 과민반응을 보인 것이라면 그것은 너무나 시대착오적이며 반역사적 오만의 극치라고밖에 볼 수 없다.

‘제주 4·3’은 이미 정부의 진상조사 보고서 채택과 대통령의 정식 사과로 일단 결말이 난 일이다. 국군통수권자는 1948년 이래 국가 공권력(군대와 경찰 등)이 저지른 과오에 대해 유족과 제주도민에게 공식적으로 머리를 숙여 사과했다. 그동안 실종된 역사로 망각을 강요당했던 ‘학살’의 진실은 비로소 역사기록으로서 기억되었다.

그동안 극우보수 세력의 집요한 반발은 진상조사 보고서의 폐기와 사과의 취소 요구, 희생자 심사에서의 끊임없는 ‘용공’이라는 낙인찍기로 이어졌다. 우익정권의 등장, 권위주의 퇴행은 이런 무모한 시도를 다시 무덤에서 불러내 과거청산을 백지화하고 집요하게 ‘민간인 학살’을 다시 음지로 되돌리려고 획책하고 있다.

작가는 평소에 북한체제에 대해 비판적 견해를 갖고 있었고, 작품 어디에도 ‘북한’이란 낱말조차 없다. 만약 이 교양소설에 대한 낙인 사유가 ‘피학살’ 경험의 서술 때문이라면 이는 도착적·자의적 오독이다. 이제는 ‘4·3’을 단지 기억하는 일조차 ‘금기’시 된다. 문학성이 뛰어난 작품을 불온시하는 짓은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에 용공의 덧을 씌워 진실과 정의, 기억투쟁의 성과를 송두리째 부정하려는 불순한 저의 때문이다. 이 정권은 시대착오적 이념을 덧칠하여 ‘제주 4·3 평화재단’ 등 향후 ‘과거사 정리’ 관련 후속조처에 대한 훼방과 엄포, 희생자 및 피해자 유족에 대한 모독, ‘과거청산’이 유폐되기를 획책하는 자들의 도발을 방조하고 있다. 따라서 군 정신교육 강화는 청년들이 자진하여 입영하고 싶은 공간인 내무반의 민주화, 자유로운 독서행위와 같은 여가 시간의 선용, 민주적 정치훈련(정훈)을 통해 보장되어야 국민과 함께하는 군대로 거듭날 수 있다.

국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은 ‘시민 교양도서’를 무단으로 선정해 군 장병 가족과 국민들을 불안하게 만든 분란의 책임을 물어 해당 부처 장관을 즉각 교체해야 마땅하다.


허상수 포럼 진실과 정의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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