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8.08.08 19:21
수정 : 2008.08.08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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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항우 충북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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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얼마 전 이명박 대통령이 ‘인터넷의 힘은 약이 아닌 독이 될 수도 있다’, ‘사회불안을 부추기는 정보전염병은 경계해야 할 대상이다’라며 인터넷 촛불 여론에 거부감을 드러내더니, 급기야 정부는 사이버 모욕죄 신설, 인터넷 실명제 적용 확대, 포털의 게시글 삭제 의무화와 같은 초강경 인터넷 여론통제 정책들을 내놓았다. 그러나 이 정책들은 우리사회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후퇴시키는 것들이기에 철회되어야 하며, 특히 인터넷 실명제는 폐지되는 것이 마땅하다.
인터넷 실명제는 익명성이 ‘악성 댓글’의 원인이라는 생각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일반의 상식과는 달리, 익명성과 악성 댓글 사이의 인과성은 과학적으로 충분히 입증된 바가 없다.
1980년대 중반부터 미국의 많은 심리학자, 경영학자, 언론학자들은 온라인 익명성과 플레이밍(혹은 악성 댓글) 사이의 연관성을 규명하기 위한 다양한 연구를 수행하였다. 그런데 그 결과는 매우 혼란스러운 것이었다. 카네기 연구소의 키슬러 연구팀은 시청각적·사회적 단서가 희박한 익명의 온라인 그룹이 실명의 온라인 그룹보다 더 자주 플레이밍에 빠져든다는 실험연구 결과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후의 연구에서는 이와는 정반대의 결과가 대다수를 차지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뉴저지 지역 대학 힐츠 연구팀의 실험 결과다. 실명 온라인 집단, 필명 온라인 집단, 대면 집단 모두에서 플레이밍 발생 빈도가 매우 낮았으며, 실명 집단과 필명 집단 사이의 플레이밍 발생 빈도는 거의 차이가 없었다는 점이 연구의 주요 결과였다.
또한 리어(Lea) 연구팀은 당시에 이루어진 수많은 실험연구들에 대한 메타분석을 통하여, 플레이밍은 온라인에서 자주 발생하는 현상이 아니며, 실명 상황에 비해 익명 상황에서 그리고 대면 상황보다 비대면 상황에서 더 자주 일어나는 것으로도 볼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집단의 성격이나 지배적인 행위규범에 따라 플레이밍 발생 빈도나 양상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다양한 실증 연구 결과에 근거할 때, 익명성과 악성 댓글 사이의 인과관계는 불분명하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도 불확실한 인과성을 근거로 우리 사회 모든 구성원에게 적용되는 인터넷 실명제를 실시한다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악성 댓글은 우리만의 특수한 문제도 아니다. 1960년대 말부터 이미 플레이밍이 컴퓨터 문화와 관련한 중요한 사회 이슈가 되어온 미국에서도 실명제가 그 해결 방안으로 진지하게 고려된 적은 없다. 익명성이 비밀투표권, 양심과 학문의 자유, 언론 및 출판의 자유, 프라이버시권과 같은 민주적 권리의 토대가 된다는 사실을 중시하는 민주 사회에서, 표현의 자유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인터넷 실명제 도입은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인터넷과 휴대폰이 선거 결과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되는 2003년 대통령 선거 직후, 한나라당은 인터넷이 ‘북한의 심리전 활동매체로 활용되는 문제점이 드러나고 있다’는 황당한 논리를 끌어대며 인터넷 실명제 도입을 처음으로 공론화하였다. 그리고 인터넷 실명제는 대통령 선거를 앞둔 작년 7월에 전면 실시되었다. 이번의 실명제 확대 적용 방침은 3개월 이상 이어지고 있는 국민들의 뜨겁고도 끈질긴 촛불시위의 와중에 발표되었다. 민주적 소양은 턱없이 부족하지만 권력은 지나치게 많은 자들이 자신들에 대한 국민의 정당한 비판을 봉쇄하기 위해 휘두르는 무기, 그것이 바로 인터넷 실명제임을 다시금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항우 충북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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