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8.08.18 21:21
수정 : 2008.08.18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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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 도모오미 일본 도시샤대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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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8월15일. 한국의 광복절이자 동시에 일본의 종전기념일인 이날, 나는 서울 거리에서 100번째 촛불집회 현장에 있었다. ‘국민은 승리한다!’, ‘이명박은 물러가라!’ 확성기를 통해 약간 쉰 듯한 남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그 뒤를 따라 수천 명의 함성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이날 저녁 7시부터 시청앞 광장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집회는 경찰의 원천봉쇄로 막혔고, 시민들은 시내 곳곳으로 흩어졌다. 명동 한국은행 앞에 모인 시민 수천 명은 집회를 마치고 이동을 시작했다. 경찰의 살수차 두 대가 도로를 막아섰다. 그러고는 양쪽에서 시민을 향해 파란색 물대포를 쏘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도로 한쪽으로 쏠렸다. 전경들은 시민들이 피해 생긴 공간을 점령했다. 그리고 방패로 땅바닥을 두드리며 위협하다가 갑자기 시민들을 향해 돌진했다. 골목으로 도망가는 시민들은 서로 뒤엉겼다.
서울 한복판에서의 이런 시위진압 장면은 내게 충격이었다. 상상 이상으로 폭력적이었다. 공포감마저 느꼈다. 그러나 한편으로 더욱 놀라웠던 것은 집회 참가 시민들이 대부분 젊은 대학생과 평범한 아줌마, 아저씨 그리고 어린아이를 포함한 가족 단위라는 사실이었다. 그 사람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알 수 없는 활기와 열기, 힘에 나는 압도됐다. 뜬금없이 한 아주머니가 경찰 앞에 혼자 나서서 “너희들은 물러나라”며 일장 연설을 하고, 참가자들은 그 아주머니에게 박수를 보내고, “아줌마 최고야!”를 외쳐주는 모습. 일본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분위기다.
나는 이 현장을 보면서 한국 민중이 가진 역동적인 에너지를 느꼈다. 한국 사람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민주화를 이루기 위해 싸워 온 역사의 무게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20여년 전, 한국의 민중은 스스로 민주화를 쟁취했고, 그 후에는 일단 달성된 민주화를 후퇴시키지는 않겠다는 의지로 이를 지켜왔다. 한편, 일본은 60, 70년대에 학생운동이 왕성했지만 결실을 내지는 못했다. 패전 후 63년이 흘렀어도 이제까지 진정한 의미의 정권교체가 이루어진 적이 없다. 본질적인 의미에서 체제가 변화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과거를 청산하지 못하고 아시아의 시민들로부터 진정한 신뢰를 획득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 사회의 역동성과는 대조적으로 일본 사회의 전반적으로 침체한 분위기는 과거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이는 정치의 문제뿐 아니라, 민중의 의식 면에서 더욱 그러하다. 내 할머니는 일본이 패전하기 직전인 1945년 3월10일에 미군 ‘비(B)-29’ 폭격기의 도쿄 대공습을 경험하셨다. 이때의 폭격은 작은 공장들이 모여 있는 도쿄의 서민촌이 공격 목표였고 저고도 폭격으로 시민들에게 무차별 공격이 이뤄졌다. 할머니는 소이탄이 떨어져 내리는 와중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필사적으로 도망쳐 겨우 살아났다고 한다. “전쟁이 끝나서 정말 다행이다. 안심했다. 두 번 다시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라는 할머니의 말씀은 진실일 것이다. 그러나 그 말에는 아시아를 침략한 ‘대일본국 신민’의 한 사람이었다는 자각은 없다. 그게 일본의 현실이다.
촛불집회를 취재하는 중에 등 뒤에서 일본인 대학생으로 보이는 남자 관광객 셋이 “총격전이라도 하면 재미있을 텐데”라고 우스갯소리를 하며 지나갔다.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는 한국의 시민과, 이를 현장에서 보면서 냉소적으로 비웃는 일본인. 일본인이 아시아의 일원으로서 신뢰받는 날이 과연 올 것인지, 마음 한구석이 무거워지는 광복절이었다. 그리고 한국 시민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모리 도모오미 일본 도시샤대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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