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8.12.01 20:33
수정 : 2008.12.01 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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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 평화협력원 선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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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000년과 2004년의 대통령 선거 결과와는 다르게,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을 뽑고서도 ‘도둑맞았다’고 여기는 미국인들은 없어 보인다. 조지 부시 행정부의 실정으로 변화와 개혁의 바람을 갈망해온 미국 유권자들에게 버락 오바마 후보는 그들이 듣고 싶어 하는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그 결과 오바마가 이끄는 미국은 부시 행정부가 그동안 걸어온 길과는 차별화되는 진로를 택할 것으로 보는 전문가가 많다. 미국은 더는 보수와 진보가 균형을 이루는 ‘50 대 50’의 나라가 아니다. 보수 성향의 부시 행정부와 짧게나마 긴밀한 동맹관계를 유지해 온 이명박 정부로서는 한-미 관계의 새로운 그림을 그려야 하는 정치·외교적 부담을 안게 됐다. 특히 진보 성향의 북한 전문가들은 통미봉남을 우려하기도 한다.
그러나 북한이 한국을 배제한 채 미국과 직거래를 할 가능성은 국제정치 역학상 높아 보이지 않는다. 미국이 여전히 초일류 강국으로 존재하고는 있지만 오늘날 국제정치 외교망이 미국 혼자서 좌지우지할 만큼 헐겁게 짜여 있지 않다. 그동안 추진해왔던 정책들을 완전히 무시하고 새롭게 짤 수도 없다. 미국발 국제금융 위기는 글로벌 리더로서의 미국의 입지를 더욱 위축시킬 가능성이 있다.
미국의 리더십은 공통의 가치를 지닌 국가들을 설득하고 이해시키는 가운데 더욱 강화된다. 하지만 때로는 이러한 동맹국들을 추수(追隨)하면서 미국의 리더십은 확장되기도 한다. 지구온난화 해결을 위한 세계 각국의 공통된 인식을 미국이 뒤늦게나마 인정한 것이 단적인 예다. 그리고 9·11 사태는 테러를 개별 국가의 문제로 치부하기가 힘들게 되었음을 입증하였다. 국제적 공조가 불가피한 사스(SARS), 컴퓨터 해커, 에이즈, 마약거래, 자금세탁 이슈들도 국가간의 상호의존성을 높이는 사안들이다. 차기 미국 행정부가 실용적이고 유연한 리더십을 발휘할 것이라는 전망도 이런 사실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북핵 문제와 관련해서 오바마 행정부는 (초기) 부시 행정부의 정파적 접근보다는 원칙에 따른 해결 방법을 찾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북핵 문제를 언제 어떠한 방법으로 연계할지를 결정하는 데도 조금 시간이 걸릴 것이다. 오바마 행정부는 외교를 통한 해결이 최우선 과제임을 항상 강조하고 있다. 그럼에도 북한이 주변 국가들의 선의적인 조처들을 무시하여 실질적인 위협이 나타나는 순간 과거 클린턴 행정부가 시도하려 했던 북한 영변 핵시설에 대한 정밀폭격 시나리오와 유사한 카드를 꺼낼 가능성도 있다. 이는 진보와 보수를 떠나 국가적 재앙을 초래하는 일이다. 지도자라면 이념을 떠나 국익을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한다.
실용주의는 이전 정책들과의 무조건적인 차별화가 아니라 기존의 것을 바탕으로 더 나은 정책을 선택하고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정책 결정자들은 새로운 것보다는 더 좋은 정책들을 만드는 데 집중해야 한다. 새로운 것이 반드시 더 낫다고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남북 기본합의서에만 현미경적인 시각을 갖고, 나머지 합의된 문건에 대해서는 망원경적인 관점을 취하는 태도는 균형감각을 결여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한-미 동맹의 관계에서도 이념이 아닌 국익을 중요시하겠다는 이명박 대통령의 발언은 분명 실용주의에 근거한 것이지만, 남북관계에서 실용주의 정신을 찾기란 어렵다는 지적이 그래서 나온다.
오바마의 승리는 분명 한-미 동맹의 양과 질의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이는 이명박 정부에 도전이자 기회다. 이 변화를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로 연결시키는 것은 국익을 최우선으로 하려는 지도자의 역량에 달려 있다.
이병철 평화협력원 선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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