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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3.19 22:35 수정 : 2009.03.19 22:35

이병민 서울대 영어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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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필고사의 폐해가 심각하다. 지필고사가 유일한 평가도구인 현실에서, 학생들은 학교나 학원에서 하루종일 문제를 푼다. 숫자로 표시된 점수로 모든 학생의 능력을 나누고 결국 너는 79점, 나는 80점짜리 학생이 된다. 그리고 우리는 학생들을 객관적으로 줄 세웠다고 자위한다. 다른 더 좋은 대안이 없다고 지필고사를 병가의 보도처럼 사용한 결과다. 그러나 이런 평가 방식이 얼마나 객관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가.

우리는 21세기를 지식정보화 사회로 규정한다. 이젠 매우 식상한 표현이다. 그러나 이런 식상함이 우리가 사용하는 학력평가에는 없다. 창의력, 커뮤니케이션 능력,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분석력과 해결력, 종합적인 사고능력과 응용력이 더 중요하다고 하지만, 지필고사에서 그런 냄새를 맡을 수 없다. 맬컴 글래드웰의 <아웃라이어스>라는 책을 보면, 빌 게이츠가 고등학교 시절 컴퓨터를 가지고 무엇을 했는지 보여준다. 우리 학생들처럼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그에게 지금과 같은 성공의 단초는 제공되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하버드대학은 그를 택했다.

우리는 어떤가. 수준별 교육을 한다고 학생들을 일률적으로 3단계나 4단계로 나눈다. 기준이 무엇인가. 교사의 주관이 개입될 것 같으니, 지필고사 성적으로 결정해 버린다. 그래서 결과는 얼마나 객관적인가. 아이의 능력과는 상관없이 반이 갈리는 경우는 없는가. 상반과 하반으로 나누었다고 하지만, 그 경계에 걸려 있는 학생들을 상과 하로 나누는 기준은 무엇인가. 이렇게 점수로 나누어서 학생들은 과연 자신의 수준에 맞는 내용을 배우고 있는가. 비교육적 편의주의 발상이다.

내신 평가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객관적이고 타당한 시험인가. 그것은 차라리 암기력, 잠 안 자는 능력, 자신의 관심사를 억제하고 인내할 수 있는 능력으로 대체해도 무방할 듯하다. 실수를 하게 되면 1~2점으로 등수가 나락으로 떨어지니 실수하지 않는 능력을 평가해도 좋을 듯하다.

이런 능력이 우리가 지향하는 교육 목표이며 우리가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능력인지 의문이다. 이런 형태의 지필고사를 통해 평가하고 1~2점으로 등수를 나누는 기준이 과연 얼마나 교육적이고 객관적인지 묻고 싶다. 교사의 주관적 판단이 개입하지 않는다고 해서 더 신뢰할 수 있고 객관적일 수 있는 여지는 많지 않다. 주관성을 배제하고 오로지 지필고사에 의해 학생을 구분하고 선발해서 우리 교육이 얻은 것은 무엇인가. 다른 선진국을 능가할 수 있는 창의적 인재를 길렀고, 학교가 정상화되었고, 학생들이 열정을 가지고 배움의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는 말은 어디에서도 들어보지 못했다.

평가는 필요하다. 지필고사의 역할을 100%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어느 평가도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특히 숫자화된 점수에 오류가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현실적이고 편리한 대안이 없다고 해서, 지금처럼 지필고사를 통해 무조건 암기하기, 안 틀리기, 실수 안 하기, 배운 내용 무한 반복하기, 1~2점에 의한 줄 세우기가 평가의 알파요 오메가가 돼서는 안 된다.

학교나 대학이 지필고사라고 하는 객관의 울타리 안에서 학생을 나누는 일에만 급급한다면, 교육은 없다. 교육에 숨통이 트이고 교육이 인간다울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야 한다. 지필고사와 함께 가르치는 사람의 직관과 양심에 따른 주관적 평가가 회복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학교 교육을 정상화하는 출발이다.

이병민 서울대 영어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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