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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민석 서울 종로구 견지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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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불쌍한 것들!’ 그날 아침은 여느 대입시험일 아침처럼 맹추위가 몰아닥쳤지만, 낮이 되면서 썰렁했던 교실 창가는 따뜻한 볕이 소중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시험이 시작되고 3, 4교시가 지나자 짧디짧은 쉬는 시간은, 눈을 반짝거리며 자신의 시험점수를 헤아려보거나 다음 시험 과목의 문제지를 들춰보는 범생이 아이들과, 나나 내 친구처럼 햇볕 잘 드는 창가에 턱을 괴고 저 멀리 운동장 너머 학교 철문에 다닥다닥 붙어 서서 견우와 직녀처럼 학교 쪽을 바라보고 있는 딱한 학부모를 나른한 눈빛으로 마주 보고 있는 더 딱한 인간들로 자연스럽게 나뉘어 있었다. 우리 둘이는 함께 앞을 응시하면서 중얼거린 것으로 기억된다. ‘나중에 우리가 장가가고 자식이 고3이 될 때쯤에는 저런 우스운 꼬라지도 없어지겠지?’ 그리고 30년. 내 딸 희재가 올해 고등학교에 들어갔다. 녀석이 중학교, 고등학교에 들어가고서야 나는 하루가 다르게 현재의 황당한 교육 상황을 깨달아가고 있는 중이다. 약삭빠른 부모들은 이미 유치원, 아니 아장아장 유아기부터 선수를 쳤다는 사실도 함께 말이다. 30년. 이젠 민주화라는 말은 물론이고 인간의 기본권과 자유라는 말이 오히려 어색할 정도로 세상이 바뀌었다지만(물론 최근 1, 2년은 말을 말자. 답답하다), 우리 아이가 타고 있는 무한경쟁이라는 폭주 기관차는 수많은 아이들의 희망을 석탄재처럼 뒤로 날리며, 여전히 목적지도 모른 채 가속 질주를 계속하고 있다. 세월이 무색하게도 그놈의 국·영·수는 더욱 찬란한 황금률로 빛나고 있으며 새로 생긴 특목고와 학교들은 학업 귀족들의 구락부로 번창하고 있다. 그 멤버십은 평생 보장될 것이라는 이 미친 사회의 굳은 약속과 함께 말이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그렇게 똑똑하고 잘난 엄마 아빠들이 청춘의 기억을 ‘망각’해 버린 것이다. 남들도 하니 난들 어쩔 수 없다는 수줍은 변명으로 우리의 이기심을 가린 채 우리의 아픈 기억은 온데간데없이 우리 자식들을 저 화덕에 처넣고 있는. 아! 우리는 구제받을래야 받을 수 없는 큰 죄인들이 아닌가! 30년 전 우리는 희재 너희 세대에서만큼은 ‘역사’나 ‘사회’가 암기 과목이 아닌 토론 과목이 되어 있어야 하고, 상위 10%만을 위한 학교가 아니라 날라리 학생들도 희망을 갖고 자기가 하고 싶은 영역에 정열을 쏟을 수 있어야 하고, 지성이 넘치는 토론과 끝없는 수다 그리고 사회를 향한 끝없는 비아냥이 허용되는 그런 학교, 햇볕 아래에서 남녀 교제가 꽃을 피우는 그런 세상이 올 줄 알았다. 정말 그때는 당연하게도 그게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리고 지금, 그런 세상은 시간이 지난다고 자연스럽게 오지 않는다는 사실도, 우리가 노력하지 않으면 결국 아무도 우리를 대신해서 역사의 과제를 써주지 않는다는 것도 이렇게 희끗희끗 중년이 되고서야 알게 되었다. 그래서 미안하구나 희재야. 하지만 지금 아빠는 세상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서 후회스럽거나 안타깝지는 않다. 이미 너는 아빠의 어쭙잖은 생각을 금세 읽어버린 큰 아이가 되어 있고, 그럼에도 세상에 대한 큰 두려움이나 거부감 없이 게으름과 시시덕거림으로 세상을 조롱하고 있으며, 주변의 멋진 선생님들과 이 사회의 거대한 틀을 이루고 있는 승리의 세대가 너희를 외호하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젠가 나와 희재가 꿈꾸는 세상은 반드시 꽃필 것이라는 꺾일 수 없는 희망이 우리 가슴에 살아 있기 때문이다. 홍민석 서울 종로구 견지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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