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04.03 19:49
수정 : 2009.04.03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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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향/수원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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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기고] 오체투지 순례를 보며
오체투지단을 처음 본 곳은 지난해 가을 남원이었다. 지리산에서 내려온 지 한 달, 그들은 차들이 쌩쌩 지나가는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 몸을 던지고 있었다. 햇볕에 익고 바람에 그을린 촌스런 얼굴에선 땀이 뚝뚝 떨어졌다. 그런데 그들은 아름다웠다. 저리도 촌스런 사람들이 아름답다니?! 그들은 시(詩)였다! 나는 내적으로 고요하고 경박하지 않아 외적으로 꾸밀 필요가 없는 무서운 아름다움을 본 것이었다. 그 아름다움은 문득문득 내 마음 허기진 곳에 내려앉아 명징한 질문을 만들었다. 너는 그렇게 온몸을 던져본 일이 있느냐.
지금 우리는 어쨌든 풍요의 시대를 살고 있다. 제일 흔한 계획이 다이어트일 정도로 먹는 것이 지나치고, 불편한 게 없는 아파트에서 편리하게 살고 있다. 편리하게는 살고 있는데 왜 우리에겐 삶을 뚫고 올라오는 희열은 생기지 않는 걸까? 날마다 거울을 보고 단정하고 오만하게는 살고 있는데 삶은 왜 하나같이 그리도 냉소적이고 그리도 지리멸렬한가? 잘 먹고, 잘 입고, 잘사는 우리에게 편견 너머, 아집 너머의 삶의 이유는 없는 걸까? 우리는 무엇에 속고 있는 것일까?
지성인은 지식에 속고, 장사치는 숫자에 속고, 공직자는 힘에 속는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집착에 속고, 연예인은 인기에 속고, 종교인은 권위에 속는다. 사는 게 죄고 생활이 업이지만 그 아집에서 빠져나오는 길은 만만치 않다. 아집이 안락해서 아집을 벗어버리는 일은 죽음보다 깊은 두려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렇게 완전히 자기를 던지는 시간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오체투지는 시위가 아니다. 시위의 방법이라면 저리도 길고 저리도 힘든 방법을 택할 리 없다. 차라리 그것은 기도의 시간이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본질적인 것을 향해 시선을 안으로 거두는 시간이다.
그들처럼 온몸을 땅에 던져본다. 녹록지가 않다. 안정적으로 호흡에 몰두하게 되기까지 몸은 얼마나 무겁고 아픈지, 마음은 또 얼마나 산란하게 흩어지는지. 시선을 안으로 돌려 몸과 마음을 돌보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
겨울잠을 깨고 일어난 오체투지 순례는 계룡산 중악단에서 다시 시작했다. 임진각을 거쳐 묘향산까지 가려는 것이다. 벌레처럼 느리고 형벌처럼 힘이 드는데도 가야 하는 이유는 ‘너’를 교정하기 위한 거라기보다 바로 ‘나’다. 온몸의 세포들이 일어나 아우성치니 자연스럽게 내부로 눈을 돌리게 되어 있다. 내 몸의 감각들을 섬세하게 관찰하고, 섬세하게 돌아보지 않으면 고통으로 무너지니까. 관찰로 극한 고통을 해체해야만 하니까. 그러다 보면 호흡만이 선명하다. 인간이 호흡이고, 호흡이 바람이고, 바람이 생명이다. 그 호흡 속에서 우리가 혹했던 숫자가 날아가고 지식이 날아간다. 집착이 녹고 권위가 녹는다. 그 호흡 속에서 모든 숨 쉬는 것들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강물은 몸 밖의 피고, 산은 몸 밖의 폐다. 우리 모두는 한 몸이어서 네가 아프면 내가 아프다. 그러니 아픔은 아픔대로 오게 하고 슬픔은 슬픔대로 받아들일밖에.
그들이 온몸을 땅에 던져 호흡할 때마다 내 속의 허기가 공명하고 내 속의 자연이 깨어난다. 거리를 성당으로, 법당으로 믿고 자기 있는 곳을 세상의 중심으로 만드는 저들이 부러웠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그들과 함께 온몸을 땅에 던지는 일을 막는 사람은 없다. 나 자신 말고는.
함께 오체투지를 해보는 건 어떨까? 시간이 날 때마다, 아니 시간을 만들어서 목적도 지우고, 목표도 지우고, 그러나 간곡하게 마음을 다잡아 나를 던져보는 것이다. 그다음 내가 보고 느낀 세상을 나만의 언어로 풀어내 본다면!
이주향/수원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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