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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8.11 20:30 수정 : 2009.08.11 20:30

안문석 한서대 국제관계학과 교수

1994년 6월 우여곡절 끝에 북한을 방문한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김일성 주석을 만났다. 당시는 핵시설 사찰 범위를 두고 북-미 갈등이 심해져 미국이 강력제재를 추진하던 상황이었다. 카터의 방북 목적은 북한의 핵활동을 동결시키고, 제재 국면을 전환하는 것이었다. 김일성을 만난 자리에서 카터는 분명히 말했다.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관을 잔류시키고 핵프로그램을 중단하면 북-미 고위급 회담이 재개된다는 것이었다. 김일성이 동의했다. 카터가 이런 합의내용을 들고 귀국하자 워싱턴이 바빠졌다. 당시 북-미 협상 수석대표였던 로버트 갈루치 국무부 차관보는 곧바로 공식 확인절차에 착수했다. 협상 상대인 강석주 외교부 제1부부장 앞으로 서신을 보냈다. 사찰관과 사찰장비의 잔류, 5㎿ 원자로 연료봉 주입 금지, 사용후 연료봉 재처리 금지는 분명히 보장되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틀 후 강석주의 서신이 도착했다. 세 가지를 모두 보장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3차 북-미 고위급 회담이 재개됐고, 결국 1차 북핵위기는 해결되었다.

생각건대 목하의 워싱턴도 94년 6월 상황과 비슷할 것이다. 북한 쪽은 “공동 관심사에 대해 폭넓은 의견을 교환했다”고 밝혀 클린턴-김정일 사이에 주요 문제들이 논의됐음을 시사했다. 클린턴 전 대통령이 김정일 위원장과의 면담에서 가져온 것들을 놓고 외교통로를 통한 확인 작업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김정일 위원장이 “9·19 공동성명을 지켜가자”고 했다면 그것이 핵시설 불능화 작업을 재개하고 검증문제를 다시 논의하자는 것인지를 확인하는 절차가 진행될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현재 북-미 관계 교착 상태의 직접원인인 시료채취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회담 일정을 조율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94년 상황에 비추어 보면 클린턴이 평양을 다녀온 지금이 북핵문제 해결 국면에서 매우 중요한 모멘텀이다. 당시 북한 내부에서는 심한 노선쟁투가 있었고, 카터를 받아들이게 된 것은 온건파가 힘을 얻을 때였다. 카터-김일성 면담에서 강석주와 같은 온건세력이 구체적인 조언을 하며 성과를 이끌어 냈다. 클린턴-김정일 면담에서도 강석주의 자리는 94년과 똑같이 최고권력자 바로 오른쪽이었다. 그레이엄 앨리슨은 외교정책이라는 것은 관료체계 속의 많은 행위자들이 갈등, 분규, 타협, 즉 ‘밀고 당기기’를 하면서 결정된다고 했다. 관료들이 자신과 자신이 속한 조직의 생존과 이익을 추구하는 측면은 북한이라고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관료 사이의 ‘밀고 당기기’에서 외부세력의 지원은 결정적인 구실을 한다.

우리 정부는 북한이 협상으로 나오고 그 협상을 이어가도록 하는 데 큰 지원세력 구실을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온건파에게 계속 힘이 실리게 하려면 대화의 이익을 구체적으로 제시해야 한다. 북한에 대한 식량이나 의약품의 대량 지원은 우선 당장 내놓아도 명분이나 실리를 모두 얻을 수 있는 방안이다. 미국 쪽이 얼마 전 언급한 포괄적 패키지도 북한이 비핵화를 실행하면 그 대가로 경제지원을 하고, 북-미 수교까지 한다는 것이다. 경제지원 부분에 대한 우리의 역할을 좀더 구체화하는 작업도 필요하다. 북한처럼 가진 것 없이 자존심 강한 특별한 정권에 대해서는 외교적 언명 또한 지원 못지않게 중요하다. ‘과거 10년 동안의 지원이 핵을 만드는 데 쓰였다’는 등의 언급은 북한내 강경파를 자극할 뿐이다. 지금이야말로 우리 정부가 잘 짜인 전략에 기반한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함으로써 ‘이명박 정부는 남북관계 발전을 위해 도대체 뭘 하고 있나’ 하는 물음에 답을 할 때다.

안문석 한서대 국제관계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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