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08.23 22:16
수정 : 2009.08.23 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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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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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전 대통령의 국장이 끝났다. 그는 이제 파란곡절의 삶을 접고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끌었던 두 전직 대통령이 나란히 국장을 거쳐 같은 곳에 잠든 것은 운명의 불가측성과는 별개로, 우리 현대사의 갈등과 대립의 변증법적 마무리로 보아도 될 듯싶다.
고인은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남은 것은 그의 업적과 정책을 공정하게 평가하고 유지를 잇는 일이다. 그동안 왜곡된 자료와 근거 없는 내용으로 폄훼해온 사람들도 선하게 태어난 인간 본성으로 돌아갔으면 싶다. 고인은 자신을 수장하려던 사람, 밧줄에 목을 걸려던 사람, 붉은 색깔을 칠하고 저주의 필탄을 퍼붓던 사람들을 모두 용서하고 갔다.
그가 추구한 가치를 요약하면 민주주의와 화해였다. 박정희 암살 소식을 듣고 “그런 식으로 민주화를 이루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뒷날 그의 묘소에 참배했다. 전두환의 사형선고에 “내 죽음을 마지막으로 절대 정치보복을 말라”고 최후진술을 남기고 실천했다.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그들을 풀어주었다.
화해와 용서는 남북관계에서도 나타났다. 외세가 가른 남북이 언제까지나 적대하면서 민족의 에너지를 낭비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었다. 6·25 전란을 지켜보며 정치의 중요성을 깨닫고 정치에 입문할 때부터 그는 전쟁의 참화와 화해의 중요성을 절감했다. 70년대 초부터 가다듬어온 4대국 보장론, 3단계 3원칙 통일론은 햇볕정책으로 발현되고 금강산 뱃길과 개성의 육로를 열었다.
나는 <김대중 평전>을 집필하면서 그가 무명시절인 1950년대 <인물계>, <신태양>, <사상계> 등에 쓴 글을 적잖이 발굴했다. ‘좌경’의 흔적과 젊은 날 사유의 편린을 찾기 위해서다. 놀랄 정도로 그는 반공주의자였다. 공산당을 이기기 위해서는 민주주의와 노동자들의 복지가 중요하다는 논지를 폈다. 정보정치의 소산이긴 하지만, 언론·지식인들의 책임이 크다. 정치지도자의 사상적 궤적을 알려면 무명시절의 행적을 찾는 것이 중요한데도 그런 수고는 하지 않고 정보기관 자료에만 의존해온 것이다.
미국 망명시절 일부의 망명정부 수립 제안을 배격한 것이나 한민통 창립 무렵 ‘선민주 후통일’ 원칙을 제시하고 이를 반대한 인사들을 단호히 배제했던 기록들을 보면서, 어떻게 저런 사람에게 용공의 너울을 씌울 수 있는가, 우리 정치·지성풍토의 천박성을 보게 되었다.
지역주의의 ‘생산자이며 수혜자’란 허물도 벗겨야 한다. 일반적으로 지역주의는 인구가 많은 지역 정치인이 표를 결속하기 위해 조장한다. 71년 대선 과정만 살펴봐도 알 수 있다.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는데도 그 사람은 잘못된 사법제도의 피해자인 동시에 수혜자라고 말하겠는가?”(강준만 교수)
고인은 유고가 된 미발표 연설문에서 “북은 핵을 완전히 포기하고 미국은 관계정상화를 통해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라”고 했다. 한국 정부엔 화해협력의 정신으로 북과 대화할 것을 촉구했다. 그의 죽음으로 북한의 고위급 ‘특사 조의 방문단’이 영결식에 참석하고 이명박 대통령도 만났다. ‘조문외교’를 통해 얽힌 외교관계를 푼 사례도 적지 않다. 6·15, 10·4 선언 정신을 살려 전쟁의 참화를 막고 평화통일의 길을 터야한다.
민주주의와 인권은 고인이 생명을 걸고 지키려 했던 제일의적 가치였다. 고인은 이명박 정부가 민주의 가치를 훼손하고 공화제를 짓밟은 ‘역주행’이 도를 넘었다고 분개하고, 서민의 삶이 무너지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정부의 정책 전환이 요구된다. 고인의 유지인 ‘민주’와 ‘화해’ 정신이 시대 가치로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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