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09.11.13 20:03 수정 : 2009.11.13 20:03

박호성 서강대 교수·정치외교학

8·15 이후 우리 사회를 줄기차게 지배해온 통치철학이 있다면, 그것은 한마디로 ‘빨리빨리, 그러나 아무렇게나’ 정신일 것이다. 말하자면 ‘대충대충’, ‘후딱후딱’ 이데올로기가 바로 보수집단의 정치이념이자 생활철학이었다는 말이다.

이러한 ‘졸속의 원리’는 조그만 도로공사에서부터 크게는 국가의 운명을 좌우할 중대한 정책 결정에 이르기까지 사회와 나라 구석구석에 스며들지 않은 곳이 없다. 예컨대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의 붕괴는 그 귀엽고 조그만 사례에 지나지 않을 정도다. 그러나 100여년 전에 일본 사람이 만들어놓은 한강대교는 아직도 끄떡없이 건재하고 있지 않은가.

또다시 ‘졸속’의 광풍이 몰아치고 있다.

무엇보다 4대강 사업의 환경영향 평가가 ‘졸속’으로 끝났다. 직접 사업비만 무려 22조원이 들고, 공사 구간만 해도 634㎞에 이른다지 않는가. 그런데 이명박 대통령 자신이 평소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백년대계’의 화두는 도대체 어디로 갔는가. 모든 것들이 ‘졸속’으로 비명횡사하고 말았다. 특히 문화재청의 수중조사 생략이 명백한 ‘문화재보호법 위반’이란 애끓는 절규까지 터져 나오는 판이다. 주요 문화재 역시 비명횡사하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겠는가.

그뿐만 아니라 ‘행정구역 통합 논의’도 ‘졸속’의 굿판을 벌이고 있다.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행정구역 통합의 절차와 내용을 신속히 왜곡할 위험성만 높여갈 뿐, 지역 주민 스스로의 자결권은 온데간데없다. 무조건 합치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나라와 지역의 미래를 멀리 내다보며 주도면밀하게 따지고 또 따져 보아야 할 것임은 두말할 나위조차 없는 일이다.

그뿐인가. 역시 ‘대충대충’ 만들어진 입학사정관 제도란 것은 학생 개개인의 소질과 역량을 제대로 평가하기는커녕 주먹구구식 관찰에 그칠 뿐 아니라 정실에 좌우될 위험성까지 농후하다는 예리한 비판에 직면해 있다. 하기야 국회까지 나서 미디어 법을 ‘후딱후딱’ 통과시켜, 헌법재판소로부터 간곡한 매를 맞기도 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대한민국의 헌법은 준엄하게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기려 마지않는다. 그런데 이러한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는 타협이 필수적이다. 사회를 무엇보다 서로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여러 이질적인 집단의 집합으로 간주하는 탓이다.

따라서 이해관계의 대립은 필연적이고, 그 가운데 어떠한 것도 절대적인 것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경쟁하는 개별 집단 사이의 타협을 필수적인 덕목으로 추앙한다. 이 경우 ‘관용’은 대립적인 이해관계의 존재를 서로 인정하면서, 협상과 타협을 통해 그 대립성을 풀어 나가려는 호혜적인 자세를 가리킨다. 그러나 원칙 없는 타협은 ‘야합’이며, 타협 없는 원칙은 ‘독선’이다.


오늘날 바로 이 독선과 야합의 정치가 활개친다. ‘후딱후딱 정치’가 원칙과 타협을 원천봉쇄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명박 정부는 진보적 양심세력에 대해서는 독선의 채찍을 내리치고 있으며, 정략적 기회주의 집단에 대해서는 야합의 당근을 선사하고 있다. 바야흐로 ‘공포정치 시대’의 막이 새로이 열리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독선과 야합의 정치는 외형적인 ‘골인 지상주의’만을 높이 기린다.

그리하여 골인 이후에 어떤 꼴사나운 일이 벌어지든, 그건 운수소관에나 맡길 일로 여기라고 을러댄다. 가령 용산 참사가 터져도 그것을 재수 없어 터지는 사고쯤으로 속 편하게 외면하고 만다. 하지만 홍수 같은 불행이 워낙 끈질기게 혀를 날름거리니, 우리 서민들은 도대체 누구를 믿고 의지할 수 있겠는가.

박호성 서강대 교수·정치외교학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기고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