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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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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 선생은 1970년 4월 박정희 정권의 언론탄압과 언론인들의 무기력한 모습을 개탄하면서 개인잡지 <씨알의 소리>를 창간했다. 당시 일흔살의 고령이었다. 함석헌은 이승만 정권의 독재·부패에 저항하여 <사상계>에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를 비롯하여 제도언론인이 하지 못한 글을 써서 구속되고, 박정희의 쿠데타를 비판한 ‘5·16을 어떻게 볼까’를 시작으로 날카로운 필봉을 휘둘렀다. 함석헌이 노령에 개인잡지를 창간한 데는 까닭이 있었다. 박정희가 한 해 전에 3선개헌을 통해 장기집권의 길을 터서 71년의 세번째 대선 출마를 앞둔 시점이다. 박정희의 장기집권 야욕이 드러나면서 제도언론은 급속히 친여 성향으로 논조가 바뀌었다. 시시비비를 가리던 신문조차 권력 쪽으로 기울었다. 학생 시위에서는 으레 언론을 성토하는 소리가 나왔다. 함석헌은 모든 언론에서 금기의 대상이 됐다. 언로는 차단되고 독재는 날이 갈수록 살벌해졌다. 씨알은 ‘할 말’을 못하고 여론은 왜곡됐다. 함석헌은 1967년 1월호 <사상계>에 ‘언론의 게릴라전을 제창한다’고 제도언론의 문제점을 고발한 터였다. 언론이 바로 서야 나라가 제대로 굴러간다며 타락한 거대언론에 대항하는 ‘게릴라언론’이 나와야 한다고 했다. 혼자 글을 쓰고 편집하여 56쪽짜리 창간호를 냈다. ‘나는 왜 이 잡지를 내나?’에는 언론에 대한 분노가 담겼다. “정부가 강도의 소굴이 되고 학교·교회·극장·방송국이 다 강도의 앞잡이가 되더라도 신문만 살아있으면 걱정이 없습니다”, “나는 정치강도에 대해 데모를 할 것 아니라 이젠 신문을 향해 데모를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사실 국민이 생각이 있는 국민이면 누가 시키는 것 없이 불매동맹을 해서 신문이 몇 개 벌써 망했어야 할 것입니다.” <씨알의 소리>는 2호를 내고 독재권력에 숨통이 막혔다. 인쇄소에 압력을 넣고는 계약된 인쇄소에서 인쇄하지 않았단 이유로 폐간시켰다. 긴 법정투쟁 끝에 복간했지만 제작·판매에 방해가 끊이지 않았다. 광고도 없고 지식인들이 겁먹어 원고를 받기도 쉽지 않았다. 장준하·송건호·이태영·안병무·법정 등 편집위원이 병풍 구실을 하고, 독재시대 의롭게 살고자 한 씨알들이 고료 없는 글을 쓰고 책을 사서 읽었다. 매호 100쪽 안팎의 초라한 잡지였지만 암울한 시대의 등불이 되고 민주정신의 길잡이가 됐다. <씨알의 소리>는 1980년 전두환의 언론통폐합 조처 때 다시 목이 졸려 강제로 폐간됐다. 함석헌은 언로를 빼앗긴 채 빈 들에서 단식투쟁을 하는 등 독재와 싸웠다. 몇 차례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됐다. 6월항쟁의 성과로 1988년 12월에 <씨알의 소리> 복간호를 낼 수 있었다. 강제 폐간 8년 만의 일이다.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제도언론은 여전히 독재의 나팔수가 되고 씨알의 편이 아니었다. 1989년 2월 함석헌은 여든여덟살로 삶을 마감했다. 후학들이 뜻을 이어받아 격월간으로 발간하여 이번 3·4월호로 통권 209호, 창간 40돌 기념호를 낸다. <씨알의 소리>를 낼 때의 언론 풍토와 지금의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다. 족벌신문은 권력에 대한 비판 기능을 찾아볼 수 없는 ‘언론권력’이 됐다. 공영방송은 차례로 정권의 직할체제로 편입됐다. 반면에 <한겨레>와 <경향신문> 등 정론 매체에는 경제적 압박으로 고사상태로 만들어가고 있다. 40년 전 상황보다 더 악화됐다. 권력은 비판세력을 억압하고 족벌신문은 잇속 찾기에 정신이 없고 방송은 ‘땡전뉴스’로 되돌아간다. 함석헌 선생의 자유언론 정신이 그립다.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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