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12.10 20:36
수정 : 2014.12.11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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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윌. 사진 에스비에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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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김훈종의 라디오 스타
지난겨울 나는 ‘겨울’이 싫었고 ‘왕국’이 지겨웠다. 청취자들의 신청곡으로 매일같이 수십 건씩 쏟아지는 그놈의 ‘렛잇고’ 덕분에. 꽃노래도 한두 번이지, 라디오 프로그램마다 흘러나오는 이디나 멘젤의 목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그런데 놀랍게도 서울에 처음 눈발이 날리던 며칠 전, <김창렬의 올드스쿨>의 오프닝 곡으로 ‘렛잇고’를 선곡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문득 생각했다. 이것이 바로 무한 버퍼링, 시즌송의 위력이다.
12월이면 신보를 내는 가수가 거의 없다. 프로그램에 중량급 가수 섭외하기가 쉽지 않다. 대신 캐럴을 비롯한 각종 겨울 시즌송 음반이 쏟아진다. 80년대와 90년대만 해도 누구나 아는 전통 캐럴송이 주류였다. 캐럴송에 인기 개그맨의 유행어나 재미난 내레이션이 감초처럼 덧붙여져 있었다. ‘달릴까 말까? 울릴까 말까?’란 영구 특유의 바보스런 목소리가 들어간 ‘징글벨’이나 최양락 특유의 트로트 창법으로 부른 ‘울면 안 돼’ 같은 곡이 대표적인 경우다. 김미화, 김한국이 ‘쓰리랑 부부’의 인기에 힘입어 만든 캐럴 앨범은 당시 5만장이 넘게 팔렸다.
그러다 2000년대 접어들면서 실력파 가수들도 속속 캐럴에 참여하게 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기획사 이름을 내건 캐럴 앨범이다. 에스이에스와 에이치오티가 참여하던 에스엠타운 캐럴 앨범은 이제 소녀시대, 엑소, 슈퍼주니어의 버전으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음반업계의 신흥 강자로 올라선 스타쉽엔터테인먼트는 씨스타와 케이윌(사진), 정기고, 매드클라운 등 자사 소속 가수 14명을 앞세워 ‘러브 이즈 유’란 윈터 프로젝트 앨범을 발표했다. 발라드 왕자 박효신과 성시경이 속해 있는 소속사 젤리피쉬엔터테인먼트의 캐럴송 ‘크리스마스니까’는 2012년 발표곡인데 2년이 지난 지금 다시 음원 차트 36위에 오르며 급상승 중이다.
시즌송은 해마다 음원 차트를 역주행하는 괴력을 보여준다. 물론 곡 자체가 끈질긴 생명력이 있어야 한다. 2010년 아이유가 지금처럼 국민 여동생이 되기 전 발표한 ‘미리 메리 크리스마스’란 곡 역시 4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2014년 12월 현재 음원 차트를 역주행 중이다. 그런데 4년이란 시간을 거슬러 올라오고 있는 아이유라고 하더라도 이 곡의 생명력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한다.
12월에 왬의 ‘라스트 크리스마스’를 당할 자가 누구냐. 조지 마이클과 앤드루 리즐리는 30년이 지나 그들이 지금 어떤 모습으로 변해 있건 12월만 되면 청취자들의 마음속에 꽃미남으로 재현된다. 그들에겐 ‘프리덤’ ‘케어리스 위스퍼’ ‘웨이크 미 업 비포 유 고 고’ 등등 수많은 히트곡이 있지만 ‘라스트 크리스마스’만한 효자는 없을 것이다. 아직도 겨울이면 라디오 피디들은 음반 더미에서 ‘라스트 크리스마스’를 경쟁적으로 찾아댄다. ‘실버벨’ ‘징글벨’ ‘화이트 크리스마스’ ‘렛 잇 스노’ 종류의 전통 캐럴에서 벗어난 첫 시도로 꼽혔던 ‘라스트 크리스마스’ 가사와 멜로디는 심지어 아직도 ‘참신하다’는 칭찬을 듣곤 한다.
올겨울 라디오 왕국엔 일찌감치 ‘새로운’ 시즌송들이 울려퍼지고 있다. 이정석의 ‘첫눈이 온다구요’ 같은 스테디셀러를 재즈풍으로 리메이크한 손승연 버전의 ‘첫눈이 온다구요’도, 바버레츠의 ‘훈훈한 크리스마스’ 같은 복고풍의 곡도 나왔다. 틴탑의 ‘눈사탕’처럼 달콤한 사랑 고백을 신나게 아이돌 음악으로 버무려 낸 곡도, 팝핀현준, 박애리 부부가 함께한 국악 스타일의 ‘산타가 온다’란 곡도 있다. 겨울 한 철 화려하게 살다 나머지 10개월을 숨죽일 운명의 새로운 시즌송들을 들으며 이 노래들이 캐럴의 본령에 닿아 있기를 바라 본다. ‘캐럴’의 어원을 따져보면 ‘둥글게 원을 그리며 돌면서 춤을 추면서 부르는 노래’라고 한다. 솔로건 커플이건, 올 한 해가 유달리 길었던 사람이든 그 반대였던 사람이든, 캐럴을 들으며 한결같이 찾는 것은 위로와 공감이다.
김훈종 SBS 라디오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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