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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7.01 09:55 수정 : 2014.07.17 10:05

윤민우 소설 <2화>



“이봐요 아가씨, 당신한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겠어요.”

나는 그녀의 말을 잘랐다. 그대로 내버려뒀다간 이야기의 불씨가 또 어디로 옮겨붙을지 알 수 없었다. 자초지종은 그 정도로 충분했다. 상담을 진행하는 데 구태여 한 권의 자서전을 참고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나는 메모한 내용들을 바탕으로 그녀가 처한 상황을 침착하고 일목요연하게 들려주었다.

“하지만 결국 일이 잘못된 거죠?” 내가 말했다. “사정이야 어찌 됐든 잘못을 입증하려면 증거가 필요합니다. 그래야 보상을 받아낼 수 있죠. 예컨대 유방에 삽입한 보형물의 안전성 점검 유무랄지, 시술상의 부주의 같은 것 말이죠. 뭐요? 알죠, 압니다. 물론 마취 상태였겠죠. 아가씨뿐만이 아닙니다. 여기로 전화를 걸어오는 분들 태반이 그런 식이에요. 완전한 무방비 상태에서 한 방을 먹는 겁니다. 소비자보호원이 그런 분들의 권리와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건 사실이지만 솔직한 심정을 말씀드려도 될까요? 지금은 상당히 배가 고플 시간이군요. 12시부터 1시까지가 이곳 점심시간입니다만. 식사는 하셨습니까?”

“정말 몰랐어요.”

“물론 그러셨겠죠. 아가씨, 이런 상황도 가능합니다. 만약 수술 후 부작용에 대한 병원 측의 사전설명 간과가 입증된다면, 설명의무 소홀에 대한 위자료를 청구할 수 있어요. 중요한 건 영수증처럼 객관적이고 자명한 증거입니다. 그걸 찾아내는 것이 지금 단계에서 아가씨가 할 수 있는 일이에요.”

“이제 와서 증거라니! 이런 일이 생기리라고 대체 누가 예상했겠어요……그래도 뭔가 쓸 만한 게 있는지 뒤져는 봐야겠죠? 모든 걸 바로잡아야 하니까.”

나는 그녀가 수술받은 성형외과의 이름과 주소를 물어 받아 적었다.

“저도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도록 하죠.”

수화기 저편에선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여보세요? 듣고 계십니까?”

그녀는 울고 있었다.

나는 10초쯤 기다려주었다.

“그럼 행운을 빕니다.”

그리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한동안 상담일을 나갈 수 없었다. 근무 중인 법률사무소에 큰 건수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자그마치 50억짜리였다. 그래서 한직에 앉은 나까지 발 벗고 나서 그 일에 매달려야만 했다. 나는 소비자보호원에 양해를 구해 한 달간 쉬기로 했다. 그 악몽 같은 한 달 내내 나는 쩔쩔매며 위통 약을 삼켰다. 일을 마무리 지었을 땐 찌든 양말처럼 녹초가 돼 있었다. 그날 밤, 나는 오랜 지기이자 상관인 변호사 친구와 함께 술을 마셨다.

그는 처음에 소송과 관련된 몇 가지 주의사항을 늘어놓았다. 그러더니 별안간 세상이 나날이 타락해간다며 불평을 해대기 시작했다. 그는 좋았던 시절을 들먹였다. 정의를 위해 싸우고 세상을 바꿔보고자 열망했던 과거를. 그게 그 친구의 단골 레퍼토리였다.

“우리가 늙은 걸까?”

내 빈 잔에 위스키를 채우며 그가 말했다.

“공룡만큼 늙었지.”

“정말인가? 그럼 큰일인데. 자, 들자고.”

우리는 건배했다.

그때, 방문이 열리며 아가씨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가 소리 나게 목 관절을 꺾었다.

“예전 같진 않겠지만.”

그는 소매까지 걷어붙이곤, 마치 점괘라도 뽑듯이, 아가씨 둘을 지목했다.

눈을 떴을 때는 늦은 오후였다. 나는 커튼과 창문을 젖혀 집 안을 환기시켰다. 땅거미처럼 온몸에 미열이 번지고 있었다. 나는 주방으로 걸어가 냉장고를 열었다. 생수 통엔 물이 세 모금가량 남아 있었다. 나는 바짝 마른 하수구처럼 물을 빨아들였다. 순수하고 얼얼한 냉기가 목구멍을 훑고 지나갔다. 나는 텅 빈 생수통을 깍지 사이에 끼워 구겼다. 플라스틱 통은 괴로운 소리를 내며 손안에서 찌부러졌다. 소리가 멎자, 집 안은 물속처럼 고요했다. 갑자기 입 밖으로 욕이 튀어나왔다.

나는 협탁 위에 놓아둔 지갑을 열어보았다. 업소에서 사용한 법인카드와 영수증이 그곳에 들어 있었다. 친구는 법인카드와 열 살 터울의 아내와 장성한 자녀들, 고급 맨션과 세단을 소유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 친구에게 오늘 내로 전화가 걸려올 것이다. 그는 혹시 자기가 실수한 것이 없느냐고 물을 테고, 나는 그를 안심시킬 것이다.

속이 쓰렸다. 뭔가 음식을 좀 삼켜야 했다. 나는 모자를 눌러쓰고 운동화를 꺾어 신었다. 그리고 더없이 무심하고 관대한 거리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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